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제목 계층·시대 넘나드는 ‘스크린 마이더스’ 이병헌
등록일 2019-10-29 조회수 92

[전찬일 강유정의 한국영화 100년의 얼굴] (17) 이병헌(1970∼)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은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양버들 가지 위에 목소리가 얹힌다. ‘달콤한 인생’은 이 첫 장면으로 다 설명되는 작품이다.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멋진 영화, 남자들만의 은밀한 겉멋이 일종의 예술이 되는 세계 말이다. 그 멋의 시작에 이병헌이 있다. 주름 하나 없는 검은색 슈트를 말끔하게 빼입고, 지문 하나 없이 매끈한 검은 세단을 타며, 늘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남자. 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김지운 감독은 배우 이병헌을 선택했다.



이병헌은 목소리가 훌륭한 배우이다. 배우에게 있어 훌륭한 목소리는 연기력을 결정하는 절반 이상의 가능성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이병헌이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면 그 첫 번째 근거가 바로 목소리이다. 단순히 소리가 좋다는 게 아니다. 이병헌은 목소리에 감정의 진폭을 담아낸다.



김지운 감독의 다른 영화 ‘밀정’(2016)에서 의열단 단장 정채산으로 등장한 이병헌은 이정출(송강호)을 만나 밤새 술을 마신다. 새벽 어스름 즈음 그는 이정출에게 묻는다. “결국,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것 아니겠소?” 이 정체불명의 질문은 이정출을 넘어 관객의 마음까지 흔든다. 마음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이병헌이 말할 때, 단어는 어떤 구체적 의미라기보다 설명 불가능하지만 분명한 느낌으로 전달된다. 배우 이병헌의 목소리를 통해 인물 정채산의 후광이 완성된다.



따지자면, 이병헌은 그렇게 몸집이 큰 배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커 보인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큰 배우, 어느새 이병헌은 한국영화사의 연대기를 기록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큰 배우가 되었다.



자타공인 목소리 연기 달인



배우 이병헌의 첫 번째 장점이 목소리라면 이 목소리는 눈빛을 통해 완강해진다. KBS 공채 탤런트로 연기를 시작한 이병헌의 드라마 시절도 사실 성공의 연속이었다. 청춘 드라마 ‘내일은 사랑’의 주연으로 이름을 알린 이병헌은 ‘아스팔트 사나이’ ‘올인’ 등 TV 드라마의 성공을 통해 스타로 자리잡게 된다. 전도연과 함께 주연을 맡은 ‘내 마음의 풍금’(감독 이영재·1999)은 이병헌의 영화계 연착륙을 알리는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17살 늦깎이 국민학생의 저돌적 짝사랑을 받아주는 풋풋한 시골 선생님으로 이병헌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연기를 선보였다.



배우 이병헌에게 2000년은 의미 있는 해였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병헌은 부지불식간에 역사의 한가운데에 서서,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에게 총구를 겨눠야 했던 아이러니한 역할인 병장 이수혁을 연기했다. 송강호 신하균 김태우 이영애와 같은 배우들과의 앙상블 속에서 그는 한국영화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될 마지막 장면, 판문점 사진 속 한 인물로 각인되었다.

 

 


번지점프를 하다

한편, 고(故) 이은주와 함께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김대승·2001)에서 이병헌은 청춘스타나 TV 스타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벗고,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평가를 얻게 된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얼핏 전통적 첫사랑 서사처럼 보이지만 훨씬 더 새롭고, 혁명적인 작품이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왈츠에 맞춰 어색하게 맞잡은 손으로 발걸음을 맞추는 애틋한 두 연인.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지만 마지막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



연인을 잃은 상실감에 시달리는 한 남자를 그리는 듯했던 작품은 훌쩍 시간이 흘러 어린 제자에게서 연인의 흔적을 찾는 판타지로 바뀐다. 세상을 떠난 연인의 영혼이 낯선 제자의 몸속에 깃들었다는 이 기막힌 판타지가 영화 ‘사랑과 영혼’처럼, 여배우의 얼굴로 오버랩되는 영상기술이 아니라 배우 여현수를 연인으로 바라보는 배우 이병헌의 눈빛을 통해 완성된 것이다.

 

 


달콤한 인생

이 믿기 힘든 ‘이야기’를 공감 어린 로맨스로 설득한 것은 바로 이병헌의 눈빛이었다.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에서, 보스를 향해 “나한테 왜 그러셨어요?”라고 물을 때도, ‘악마를 보았다’(김지운·2010)에서 악마 같은 살인마를 향해 달려들 때도, 이 눈빛이 바로 설득의 근거가 되고 개연성이 되어 주었다. 눈빛을 통해 캐릭터를 연기하고, 변주하는 배우, 그런 배우가 바로 이병헌이다.



현실을 만들줄 아는 연기자



2000년대 초반은 이병헌의 전성기였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모험을 한다. 그렇다고 그가 다른 배우들처럼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거나 이중언어 구사자도 아니었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배우들에게 요구되는 단단한 근육질 몸매를 이미 갖춘 것도 아니었다.

 

 


밀정

이병헌은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연기를 해내기 위해 원어민 수준으로 언어를 연마하고, 몸을 만들고, 액션을 수련했다. 말 그대로 그는 그에게 덥석 주어진 연기를 한 게 아니라 아직 한국 배우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어떤 ‘현실’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이병헌이 할리우드에서 참여한 작품은 ‘지.아이.조’ ‘레드: 더 레전드’ ‘터미네이터 제네시스’ ‘미스컨덕트’ ‘매그니피센트7’ 등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작은 조역 정도로 얼굴만 내민 게 아니라 명실상부한 주연급으로 출연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영화계에 이런 소식은 전례를 찾기 힘들었다. 여러 배우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하고자 했지만 이병헌처럼 성공을 거둔 사례는 드물었다. 그는 한국 배우로서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는 데 성공한 게 아니라 그저 국적이 한국인인 배우로서 할리우드 영화의 주역이 되었다. 인종 할당이나 다양성 차원에서 배려된 캐스팅이 아니라 그를 통해 배역이 재해석된 작품들인 셈이다.

 

 


매그니피센트7

전설적인 웨스턴 무비, ‘황야의 7인’을 리메이크한 ‘매그니피센트7’만 해도 그렇다. 그는 덴젤 워싱턴, 크리스 프랫 등과 함께 영화의 주역 7인 중 한 명으로 등장했다. 이병헌에게는 이미 한국인이라는 수식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병헌이라는 배우의 개성이 전 세계 영화 시장에 명확히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병헌, 그는 지금껏 어떤 한국의 배우들이 만들지 못했던 현실을 만들어 낸 배우임에 분명하다.



변화를 두려워 않는 배우



이병헌의 영화 이력은 탄탄대로였지만 그의 삶 자체가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이런저런 스캔들도 있었고, 볼썽사나운 송사의 당사자이기도 했다. 놀라운 것은 그런 논란을 잠재운 것이 이병헌 그 자신, 그의 연기였다는 점이다. 이병헌은 배우로서, 연기를 통해 스스로의 논란을 잠재웠다. 자연인 이병헌에 대한 호불호가 나뉠 수 있어도, 배우 이병헌의 평가는 엇갈리지 않는다. 배우의 사생활이 연기에 전폭적으로 반영되는 한국영화사에 있어서도 이병헌은 매우 독특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내부자들

최근 이병헌의 영화는 더욱 다양해졌다. 로맨스, 코미디, 액션 등 거의 겹치지 않는 장르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장르뿐만이 아니라 매번 캐릭터도 달라진다. 우민호 감독의 ‘내부자들’(2015)의 낙오된 조직폭력배 안상구, ‘마스터’(조의석·2016)의 글로벌 다단계 사기꾼 진 회장, ‘그것만이 내 세상’(최성현·2018)의 삼류 건달 김조하처럼, 이병헌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캐릭터들을 연기하고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

이병헌은 사회 밑바닥 계층이라고 할 수 있을 조직폭력배나 건달, 다단계 범죄자 역할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남한산성’(황동혁·2017) 속 최명길의 복잡다단한 패배감을 연기한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추창민·2012)에서 울분에 찬 광해군과 그와 닮아 왕을 연기하는 천민 광대를 동시에 해내듯 이병헌은 여러 감정과 다양한 계층, 다른 시대를 연기해낸다. 그리고 그 모든 작품에 있어서 인간 이병헌을 관통한 캐릭터를 드러내는 데 성공한다.

 

 


남한산성

이병헌의 연기가 앙상블 가운데서 더 두드러진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남한산성’의 최명길은 김윤석의 김상헌과 대조를 이룸으로써 그 온화한 강직함과 굴욕적 인내심이 더 깊이 있게 전달된다. ‘내부자들’의 안상구가 조승우가 맡은 만년 평검사 우장훈과 함께 있을 때 더 입체적으로 전달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병헌의 진짜 전성기는 어쩌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