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제목 정시우의 배우만발 | 거대 서사를 견디는 ‘이병헌의 표정’
등록일 2020-01-17 조회수 736

남산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 성격이 가장 급변한 지역 중 하나다. 지금은 서울의 관광명소로 유명하지만, 과거 한땐 공포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 중심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중앙정보부 부장은 국가의 권력 2인자로 불렸다.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필두로 적지 않은 2인자들이 이 자리에서 권력의 달콤한 맛과 쓴맛을 봤다. 그중에 김재규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슴을 향해 총알을 발사한 인물. 10·26 사태의 주인공이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이병헌 스틸. 사진 쇼박스



10·26 사태는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2005)로 영화화된 바 있다. 임상수 감독은 민감한 소재를 리얼리즘 대신 블랙코미디로 풀어냈다. 제목처럼 다양한 인간군상의 시선으로 역사를 독하게 조명했다. 이 소재를 15년 만에 <남산의 부장들>로 꺼내든 우민호 감독의 선택은 느와르의 향취를 품은 정극이다. 전 동아일보 김충식 작가가 쓴 동명의 논픽션 베스트셀러가 원작이다. 제목 그대로 2인자들이 전면에 선다. 김재규를 연상시키는 김규평(이병헌),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미국으로 망명한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 한창 권력의 맛을 보는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이 주인공이다. 박통(이성민)을 중심으로 고발하려는 자, 권력에 기생하는 자, 권력을 탐하는 자, 믿은 안에서 고뇌하는 자들이 으르렁거린다.



<남산의 부장들>이 주목하는 것은 결국 권력의 한계와 민낯이다. 배신과 충성과 존경과 견제다. 흥미롭게도 김규평를 연기한 이병헌은 이런 싸움에서 이미 큰 흔적을 남긴 바 있다. 김지운 감독과 함께 한 <달콤한 인생>에서 그랬다. 보스(김영철)를 위해 ‘칠 년 동안 개처럼’ 일해 온 선우(이병헌)는 자신이 조직에서 버림받은 이유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 보스에게 묻는다. “저한테 왜 그랬어요?” 이 물음은 <남산의 부장들>에서 유효하다. 김규평에게 박통은 미스터리다. 그는 오랜 시간 모신 박통의 마음을 추적하려 애쓴다. 저 말에 담긴 의중은 무엇일까. 왜 나를 멀리하는가. 여전히 신뢰하는 것인가. ‘혁명’을 함께 한 나에게 설마 칼을 꽂을까. 헬리콥터에서 자리를 얻지 못하는 상황까지 가자 그는 묻고 싶었을 것이다. “나에게 왜 그래요?” 선우가 보스에게 그랬듯, 김규평은 박통의 심장에 총을 쏜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왜 그랬냐”는 질문은 김재규에게 향한다. “김재규는 왜 박통을 죽였는가.”




영화 ‘남산의 부장들’ 이병헌 스틸. 사진 쇼박스



김재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래서 연기자 입장에선 매력적이지만 또 부담이다. 연기 내공 100단 능구렁이 이병헌은 현재진행형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관객으로 하여금 캐릭터에 다가서게 하면서 또 밀어낸다. 표정으로 인물을 이해하게 하면서 거리를 두게 한다.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도망칠 듯 도망치지 않는다. 불안과 좌절, 한탄과 번민, 초조함과 모멸감….클로즈업의 무덤인 이 영화에서 미세한 안면근육만으로 거대한 서사를 실어나른다. 아, 그러니까 연기를 잘한다는 표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영역의 몸짓과 표정이 이병헌 얼굴 안에 있다. <남산의 부장들>이 이병헌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앞으로 그의 연기를 언급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되리라 믿는 이유다.



그리고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사람. 이병헌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연기한 이성민이다. 나는 이성민이 이 어려운 인물을 어떻게 연기할지 내심 궁금했다. 너무 인간적으로 그려내면 그의 통치 아래 혹독한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상처일 것이고, 반대로 악독하게만 그려내면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불경하게 보일 것이다. 놀랍게도 이성민은 인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자기를 그냥 버린 것처럼 보인다. 몇몇 장면에서 이성민은 그냥 박통이다. (이건 단순히 분장으로 외모를 비슷하게 했다는 뜻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인물에 대한 배우 개인의 판단을 보류하게 만든다. 실제 인물이 필름 안에 있는 것 같은 착각. 그것이 도리어 차갑고 냉정하게 캐릭터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이병헌 스틸. 사진 쇼박스



배우의 영화가 있고 감독의 영화가 있다. <남산의 부장들>을 굳이 가르자면, 이건 배우의 영화다. 배우들의 표정과 역량이 영화 전반의 건조하고 스산한 영역을 데운다. 편집이 늘어지면서 구멍 난 찰기를 보완하는 것 역시 배우들이다. 이건 선수들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