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KBS 탤런트 공채 14기로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시험을 통과한 것이 경력의 시작이었다. 연기 외에 개인기를 보여 달라는 면접관의 말에 이병헌은 장기인 브레이크 댄스를 선보이며 큰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데뷔작은 1991년 KBS2 드라마 ‘아스팔트 내 고향’이었는데, 잠재성을 인정받아 보통 신인 배우가 단역으로 출발하는 관행을 깨고 처음부터 비중 있는 조연을 맡게 된다.



데뷔작은 젊은 이병헌에게 혹독한 경험을 안겨 주었다. ‘아스팔트 내 고향’의 연출자는 김수현 작가와 종종 합을 맞추며 명망 높던 정을영 PD(배우 정경호의 아버지)였는데, 첫 촬영을 마친 뒤 전 스태프가 보는 가운데 이병헌으로 하여금 “이 작품은 내 데뷔작이자 은퇴작이다”라는 말을 복창하도록 시켰고, 촬영기간 내내 연기를 못한다면서 심한 혹평을 퍼붓곤 했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때 겪은 독설과 수모는 그로 하여금 더욱 연기에 매진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듬해인 1992년 대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을 그린 청춘드라마 ‘내일은 사랑’이 히트를 하면서 이병헌은 극 중 커플로 나온 박소현과 함께 대표적인 청춘 스타가 된다.






이병헌(가운데)은 KBS 드라마 ‘내일은 사랑’을 통해 스타로 발돋움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드라마로 먼저 인정 받은 ‘뵨사마’ 

연기력과 스타성을 인정받은 이병헌은 한동안 안방극장에서 커리어를 쌓아 나갔다. 1994년부터는 억대 출연료를 제안받은 ‘사랑의 향기’를 계기로 SBS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두 방송사를 오가며 활동했다. ‘내일은 사랑’을 쓴 손영목 작가와의 인연으로 수락한 ‘바람의 아들’(1995)이 2009년 ‘아이리스’로 복귀하기 전까지 KBS에서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 신현준 김희선 손창민 등 당대의 인기 스타들을 망라한 이 드라마에서 이병헌은 김영철이 맡은 장하수의 동생 장홍표를 연기했다. 두 사람은 훗날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2005)에서 두목과 2인자의 관계로 재회하게 된다.



일정 편수의 SBS 작품에 출연한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한 이병헌의 드라마 시절은 ‘아스팔트 사나이’(1995), ‘해피 투게더’(1999), ‘아름다운 날들’(2001)을 거쳐 카지노 세계를 배경으로 송혜교와 공연한 ‘올인’까지 계속된다. 특히 ‘올인’은 평균 시청률 40%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고, 이병헌은 2003년 SBS 연기대상을 차지하면서 탤런트 경력에 정점을 찍었다. 최지우와 호흡을 맞춘 ‘아름다운 날들’에 이어 ‘올인’이 일본에서도 전파를 타 큰 히트를 하면서, 이병헌은 ‘욘사마’ 배용준과 쌍벽을 이루는 한류 스타 ‘뵨사마’가 됐다.



“솔직히 망한 영화도 있었지만, 난 그래도 좋았다. 그런데 두 편째 실패하고 나니 주위에서 ‘야, 너 충무로에 어떤 미신이 있는 줄 알아? 영화 세 편을 해도 안 되는 배우는 그 뒤로 절대 안 쓴다’고 하더라. (중략) 그런데 네 번째 영화마저 흥행이 안 되니까, 이번엔 날 다 피했다. 하하. 그런데 다섯 번째 영화 ‘내 마음의 풍금’부터 흥행이 되기 시작하더니 여섯 번째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서 터지니까 ‘넌 (권투선수) 홍수환보다 더 대단한 놈’이라고 하더라.”(여성동아 2005년 1월호 이병헌 인터뷰)






이병헌의 영화 데뷔작인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1995). 이병헌은 최진실과 호흡을 맞춘 이 영화에서 소심한 남자의 여러 면모를 보여주나 흥행에는 크게 실패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병헌은 ‘지상만가’(1997)에서 할리우드 진출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배우 지망생을 연기했다. 영화는 주목 받지 못했지만, 이병헌은 이후 실제로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농담 같던 할리우드 진출 꿈까지 

드라마에서는 승승장구하며 상승세를 탔지만, 영화배우 이병헌의 필모그래피는 내리막의 연속이었다. 인기를 발판 삼아 영화에 진출한 건 수월했지만, 영화 연기는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영역이었고 작품 운도 따라주지 않아 매번 고배를 마셨다. 최진실과 공동 주연한 데뷔작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1995)와 김성수 감독의 스릴러 ‘런어웨이’(1995)로 제6회 춘사영화제와 제34회 대종상영화제에서 각각 신인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평가와 흥행은 처참했다. 전도연 이미연이 함께 한 로맨스 영화 ‘내 마음의 풍금’(1999)에서 연기한 선생님 역이 호평받은 걸로 간신히 체면치레를 하는 정도였다.



이 무렵의 출연작 중 흥미로운 건 ‘지상만가’(1997)다. 여기서 이병헌은 할리우드에 진출해 오스카상을 수상할 꿈에 젖은 몽상가 청년으로 등장한다. 흑역사로 취급되는 이 망작은 공교롭게도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2009)과 ‘지.아이.조 2’(2013), ‘레드: 더 레전드’(2013), ‘터미네이터 제니시스’(2015), ‘매그니피센트 7’(2016) 등을 찍으며 할리우드 진출을 현실로 이루게 될 그의 미래를 예언한 격이 됐다.



“나는 늘 병헌씨가 지나치게 계산하고 준비하지만 않으면 훨씬 더 좋은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중략) 5명의 주요 등장 인물 중에 가장 연기하기 까다로운 배역은 역시 수혁이었습니다. 제가 원했던 것은 ‘가장 건강하고 평범한 젊은이’인데, 배우 입장에서는 가장 평범한 연기가 가장 특별하게 어려운 법이니까요. 그 일을 완벽하게 해낸 병헌씨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박찬욱 저 ’박찬욱의 몽타주’)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6개월 단기사병으로 전환돼 군목무를 치른 이병헌은 2000년 2월 복귀해 배우 활동을 재개한다. 그리고 ‘공동경비구역 JSA’로 배우 경력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송강호 이영애 신하균 김태우 등 쟁쟁한 배우들과 합을 맞추며 밀리지 않는 연기로 두각을 드러냈고, 이때부터 출연 제의가 들어오는 작품의 질이 달라졌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성공한 뒤 받은 시나리오들 중에 훌륭한 작품이 많아 놀랐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김대승 감독의 데뷔작 ‘번지점프를 하다’(2001)에서도 이병헌은 인물의 연령대에 따라 결을 달리하는 연기와 거침없는 동성애 표현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올인’ 종영 후 드라마 계약에서 자유로워진 이병헌은 영화에 전념하기로 한다. 그리고 ‘달콤한 인생’의 선우 역을 제안받으면서 '일적으로도 훌륭한 파트너, 사적으로는 정말 친한 친구' 김지운 감독과 만나게 된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로 이병헌은 스크린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병헌은 ‘달콤한 인생’(2005)으로 김지운 감독과 인연을 맺게 돼 이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악마를 보았다’ 등에 출연하며 김 감독의 페르소나가 된다. 쇼박스 제공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 잔”이라는 유행어를 낳으며 흥행에 성공한 영화 ‘내부자들’. 이병헌은 과격하면서도 우스꽝스럽고 정감 있는 깡패를 연기하며 관객의 환호를 샀다. 쇼박스 제공






이병헌은 영화 ‘매그니피센트7’(2016)에 출연하는 등 할리우드에서도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다. UPI코리아 제공


 ◇김지운 감독의 페르소나 

“이병헌과 만나기로 했다. 또래의 한국 연기자 중 어떤 모호한 감정의 흔들림과 그 흔들림을 자기 안에서 파장시키고, 걷잡을 수 없는 장렬한 파멸감을 섬세한 빛깔로 연기해야 하는 주인공 선우 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감히 이병헌뿐이라고 생각했다.” (김지운 감독이 직접 쓴 ‘달콤한 인생’ 제작기, ‘씨네 21’ 2005년 3월 29일호)



‘달콤한 인생’의 촬영 과정은 위험천만한 일의 연속이었다. 겨울에 찬물을 뒤집어쓴 채 몇 시간 동안 천장에 매달리고, 몸에 특수 촬영장비를 단 채 불붙은 각목을 휘두르며 액션 장면을 소화하는가 하면, 구덩이 생매장 장면을 찍다가 진짜로 생매장될 뻔하는 등 개인 건강관리사를 따로 둘 만큼 죽도록 고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 이르러 몸동작을 절제한 가운데, 표정의 미세한 흔들림을 통해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는 이병헌 특유의 우아한 미니멀리즘 연기가 완성됐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에서 처음으로 악역으로의 연기 변신을 시도한 이병헌은 ‘악마를 보았다’(2010)의 엔딩에서 복수를 달성한 뒤의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뒤섞인 모호한 감정을 표현해내는 등 거듭되는 김지운 감독과의 작업을 통해 연기에 한층 깊이를 더해갔다. 이후 ‘밀정’(2016)에 의열단원 정채산 역으로 참여하며 명실공히 김지운의 페르소나임을 입증했다.



이병헌의 연기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와 ‘남한산성’(2017)으로 사극에도 일가견을 보였고, ‘내부자들’(2015), ‘그것만이 내 세상’(2018)과 ‘백두산’(2019)에서는 장르 영화의 정형화된 배역 연기에도 능숙함을 보여 줬다. ‘남산의 부장들’(2020)은 ‘달콤한 인생’에서 정립된 이병헌의 내면 연기가 더욱 원숙해졌음을 보여 준다. 다방면의 연기 변신을 거쳐 전천후 연기자로 거듭난 이병헌은 한국 영화의 한 귀퉁이를 지탱하는 거목이 됐다.





조재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