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제목 [ESQUIRE] 이병헌의 여정
등록일 2019-01-02 조회수 2080
PEOPLE 이병헌의 여정
이병헌은 가본다. 갈 수 있는 데까지.

문페이즈 기능과 함께 1/6초 단위의 시간을 표기하는 디테일이 돋보이는 제품. 두 개의 독립적인 메커니즘이 적용된 듀얼윙 콘셉트와 시계 내부 구조를 드러내는 오픈된 다이얼이 특징인 듀오미터 퀀템 루너 예거 르쿨트르. 터틀넥 라르디니 by 샌프란시스코마켓.

못 알아볼 줄 알았습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개봉할 즈음이니까 대략 10년 만인가요?
10년이나 됐나요? 오래되긴 오래됐네요.

촬영 현장에서 만났었죠.
부안이었나요?

진짜 뜨거운 불가마 옆에서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액션 신이었는데 상당히 위험한 장면이었어요. 그걸 대역 없이 소화하더라고요. 컷 소리가 나자마자 딱 뒤를 돌아봤는데 카메라 뒤에 있던 저와 눈이 마주친 거죠. 눈빛이 완전 <놈놈놈>의 주인공 박창이였어요. 저도 모르게 엄치 척을 했었다는. 그랬더니 저를 보고 씩 특유의 미소를 보냈던 기억이 선명하네요.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이네요.
10년 전인데 그때와 외모가 별로 안 변하셨어요. 편집장이시라는데 아직도 어려 보여요.

저한테 하실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나이가 보여요. 제가 생각하기엔.

나이에 어울리는 멋스러움이 있지만 나이를 잊은 듯한 청년스러움이 있어야, 멋이어도 안 느끼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이만큼 멋있는 남자도 드물지만 나이만큼 멋있는데 안 느끼한 남자는 더 찾아보기 어려운 거죠. 멋의 과잉이랄까요. 오늘 커버 촬영을 진행한 백진희 패션 에디터도 같은 말씀을 하시던데요. 이병헌의 멋에는 과잉이 없다고.
사실 어제 부산에서 <남산의 부장들> 촬영을 하고 새벽에 서울로 올라왔어요. 거의 잠을 못 자고 나왔거든요. 그래도 화보 촬영이니까 멋지게 해주겠지 기대는 했는데 도무지 잠이 안 깨는 거예요. 사진 찍을 때도 컨디션이라는 게 있잖아요. 하도 잠이 안 깨니까 제가 너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왔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솔직히 이제까지 사진을 수백 수천 번 찍었잖아요. 제가 모르는 제 모습이 뭐가 있을까 고민이 될 때가 있어요. 카메라 앞에 서 있으면 똑같은 표정이 나오는 걸 문득 느낄 때가 있거든요. 내가 자동적으로 표정을 만들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에는 그게 너무 싫거든요. 조명이 비치니까 바로 나와버리는 표정. 그런 게 느껴지는 순간이 별로 안 좋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작전을 좀 바꿨어요. 오늘은 컨디션도 별로니까 그냥 날 놔버리자. 놔보자.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랬을까요. 억지스럽게 멋지지 않고 과하게 멋지지도 않고 자연스러웠던 게.
독자분들도 그렇게 봐주시면 고마운데. 전 아까 사진을 보니까 오늘 내가 진짜 나를 다 놨구나 싶던데요. 외모는 놓으면 안 되는데, 오늘 놓아버렸어요.

나도 모르게 자기 복제를 하는 나를 보면 참을 수가 없다. 언제나 새롭고 싶다.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어땠나요? 지금이 <미스터 션샤인>이 끝나고 처음 하는 인터뷰죠?
아예 안 했어요. 그래서 오늘은 <미스터 션샤인> 얘기는 안 하려고요.(큰 웃음)

(웃음) 유진 초이님, 나한테 왜 이러세요. 안 됩니다. 나름 <미스터 션샤인>의 열성 시청자였다고요. 김은숙 작가의 팬이고. 10월호 ‘편집장의 글’에도 아예 작정하고 ‘김은숙 월드’라는 팬레터를 썼네요. <에스콰이어>와 세계관을 공유하는 당대 최고의 드라마 작가라고. 배우 이병헌한테는 어땠을까요? 김은숙이 창조한 남자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었다는 말씀을 하셨던데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저는 드라마를 잘 안 봐요. 어떤 작품이든 끝까지 보지 않으면 찝찝해하는 성격이거든요. 제가 스물 몇 시간을 끝까지 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아예 시작도 하지 말자는 생각이 커요. 그래서 김은숙 작가의 작품도 본 적이 없었어요. <미스터 션샤인>을 촬영하면서도.

이병헌은 김은숙 드라마를 본 적이 없었다?
김은숙 작가가 워낙 유명하니까 많은 얘기를 들었죠. 정말 좋은 작가다, 말씀하신 것처럼 본인만의 세계가 있다, 언어유희가 무엇인지 안다.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회자될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요. 그렇다면 나도 내 입으로 김은숙의 대사를 해보고 싶다. 비록 김은숙만의 대사가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그런 생각은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 시발점이 됐던 건 BH엔터테인먼트 손석우 대표예요. 제 등을 떠밀어줬죠.

김은숙 작가와의 첫 만남은 어땠나요?
되게 특이한 사람이더라고요. 뭔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그렇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정말 많은 생각이 담겨 있고.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보통 사람과는 다른 김은숙 작가만의 인상은 자신감이었어요. 자신감이 굉장히 대단해요. 어떻게 저렇게까지 자신감이 있을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어떤 사람한테는 그게 포장일 수도 있는데.

배우를 설득하기 위한?
그렇다기보다는 살짝 열등감이 있거나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낄 때 오히려 더 큰 자신감을 보이잖아요. 김은숙 작가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어요. 워낙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지점이 독특하고 남달라 보였고 저한테는 좋게 보였어요. 그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요.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작품의 줄거리 정도는 알고 가셨을 텐데요.
그랬나? 그냥 얘기만 대충 듣고 갔던 것 같아요.

100년 전 의병들의 이야기. 조선인인데 미국인으로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
그런 설정 자체가 되게 재미있었어요. 어떤 아이가 밀항을 해서 미국까지 흘러가고 어른이 된 다음에 미국인으로서 한국으로 돌아온다. 되게 독특하다고 생각했죠. 무엇보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다. 그런 이방인의 시각을 갖고 조선 땅을 다시 밟는다. 새로운 시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 눈에는 이 나라가 어떻게 보일까.

박원의 주제가 ‘이방인’이 떠오르네요.
이방인의 시각으로 조선을 바라본다는 게 호기심을 자극했어요. 안 좋은 기억으로 가득한 조선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사람 눈에 조선은 어떻게 보일까.


44mm 티타늄 케이스에 24개 세계 주요 도시의 시간을 동시에 표기하는 여행자를 위한 시계, 폴라리스 크로노그래프 월드 타임 예거 르쿨트르. 트렌치코트 조르지오 아르마니. 셔츠 톰 포드.

그런데 왜 유진 초이는 꼭 이병헌이 연기해야 한다던가요?
(웃음) 모르겠어요. 일단 제가 나이가 많아서? 제가 캐스팅돼서 설정이 그렇게 된 건지, 나이가 그래서 제가 캐스팅된 건지, 제가 미국 영화를 경험했다고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한 건지. 캐스팅 이유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김은숙 작가가 <미스터 션샤인>은 이런 이유로 이병헌이어야 한다고 얘기했을 듯해서요.
이번 작품은 연기를 엄청 잘해야 돼서 저를 캐스팅했다는 얘기를 했어요. 근데 그거야 저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일 테고요.

드라마 촬영이 한창일 때 이렇게 소문이 났어요.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작품이 뜬다. 연기력도 엄청나게 필요하고 여러 언어도 능숙하게 구사해야 한다. 이병헌 말고는 대안이 없다.
극 중에서 언어는 영어와 일어 두 개만 하는데. 여러 개까진 아니고.

실제로 <미스터 션샤인>은 이병헌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유진 초이가 도쿄에서 고애신을 구하기 위해 미국 공사관으로 달려가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영어 대사 한 줄. “I’m captain Eugene Choi of the US Marine Corps and this is my wife.” 이게 별것 아닌 대사 같지만 아니거든요. 실제로 해봐서 알아요.
실제로?

진짜 연습을 여러 번 해봤는데, 그 순간의 급박함과 절박한 감정을 담으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카리스마 있는 표정까지 지켜내면서 세련된 영어 발음까지 구사한다는 게 불가능해요. 타국의 언어로 이렇게까지 감정 연기를 하는 배우가 존재한다는 게 그저 놀랍죠.
미국에서 처음 영화를 찍을 때 바로 그 고민 때문에 되게 괴로웠어요. 미국 사람들 앞에서 영어 잘하는 걸 뽐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게 자랑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 언어로 연기를 하는 건 저한테는 엄청난 숙제였어요. 영어를 잘하는 건 너무 기본이고, 그 언어로 연기를 잘해야 하는데.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에 포커스를 둔 게 아니라 영어가 모국어인 유진 초이의 시점에서 감정을 담아내야 했죠.

그건 결국 영어로 실전 연기를 무수하게 해본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경지 같아요. 한국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쌓아온 이병헌의 내공이 <미스터 션샤인>에 담겨 있는 거죠. 다들 이병헌 하면 목소리부터 말하지만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그렇고 오늘 <에스콰이어> 커버 촬영에서도 그렇고, 이병헌의 진정한 힘은 눈빛에 있구나 싶었어요. 유진 초이는 끊임없이 흔들려요. 미국으로 돌아가서 미국인으로 잘 살 수 있는데 왜 이 여자를 사랑하는지. 왜 조선에, 고애신한테 한 발자국씩 다가갈까. 유진 초이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요. 그 이유를 흔들리는 눈빛으로 표현하니까.
그 눈빛은 제가 살아온 세월이나 제가 겪어온 경험을 통해서 나오는 것 같아요. 연기하는 순간에 그걸 기억해내고 그런 삶의 기억이 저한테 계속 묻어나고. 그런 걸 몸이 기억하고 있고 그 감정이 눈빛으로 나오는 거죠. 절대 머리로 기억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눈빛을 끄집어내는 것도 배우의 노력일 수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냥 선물받은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배우로서 참 좋은 얼굴을 갖고 태어났다는 말. 그런 건 타고나는 거잖아요. 선천적인 거니까 선물이죠.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

이병헌이 받은 선물은 무엇일까요?
강한 턱이 아닐까요?

목소리도 아니고 눈빛도 아니고 강한 턱? 이병헌 하면 떠오르는 던킨도너츠 미소가 있긴 한데 말이죠.
그게 아니라, 제가 말하는 강한 턱은 제 얼굴의 구조예요. 어떤 사람은 제 얼굴을 보고 네모난 밥통 같다고 얘기하지만(웃음). 저는 어느 순간 사진이나 영화나 드라마를 봤을 때 저건 부모님께 잘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목소리도 좋고 눈빛도 깊고 턱도 강한 유진 초이는 도대체 왜 고애신한테 갈까요? 조선이 망하는 길로 걷겠다더니 왜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갈까요? 배우 스스로도 그걸 납득하는 게 중요했을 텐데요.
누군가를 엄청나게 사랑한다는 감정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잖아요. 이래서 이런 거라고 100% 설명하기 힘들죠. 사랑이라는 감정에 이 인물은 틀림없이 크게 흔들렸을 거예요. 하지만 전 사랑이 모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유진 초이는 어떤 임무를 갖고 조선에 왔어요. 처음에는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죠. 그런데 조선이 처한 실상을 수년 동안 보고 듣고 겪게 돼요. 그러니까 무엇이 옳고 그르다 정도는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조선을 복수의 대상으로 여겼는데도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 움직인 거죠. 하지만 유진 초이의 최후는 결국 조선이 아니라 고애신을 위한 거죠. 당신은 나라를 구하라. 나는 당신을 구하겠다.

인간은 인간을 위해 죽고 살아요. 그래서 사랑은 위대하고 위험하죠.
유진 초이라는 인물이 살아온 인생도 생각해봤어요. 생각해보면 정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죠. 죽기 살기로 살았죠. 이방인의 신분으로 흑인 군인을 보면서 나도 미국인이 되면 되겠구나 생각해요. 그것 아니면 살길이 없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렇게 살아온 독종 같은 마음은 여전하겠죠. 하지만 철저하게 고독한 인물이에요. 그런 대사가 있잖아요. 미국에서 나는 조선인이고 조선에서 나는 미국인이다.

절박하게 살아왔고 외롭게 살고 있고. 그런 사람에게 사랑이 주어진 거네요.
그렇게 살아왔기에 유진 초이는 자기 삶에 대해 늘 비관적이죠. 그런 태도가 없지 않았어요. <미스터 션샤인>을 미국에 사는 교포분들이 특히 좋아했다고 들었어요. 진짜 유진 초이처럼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정말 많으니까.

21세기의 유진 초이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 그게 유진 초이를 지배하는 감정이죠. 제가 교포분들한테 직접 들었거든요. 유진 초이한테 감정이입이 잘됐다고.


42mm 핑크 골드 케이스와 입체감이 돋보이는 그레이 컬러 다이얼, 브라운 악어가죽 스트랩이 조화를 이룬 폴라리스 크로노그래프 예거 르쿨트르. 코트, 터틀넥, 바지 모두 톰 포드. 부츠 까르미나 by 유니페어.

김은숙 작가는 배우의 캐릭터에서 배역의 캐릭터를 꺼내 올 때가 있어요. 로댕이 한 말이 있는데, 자신은 돌을 조각하는 게 아니라 돌 안에서 조각 작품을 꺼내 오는 거라고.
멋진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라면 배역의 캐릭터가 배우의 캐릭터 안에 이미 있고, 그걸 감독과 작가가 꺼내 오는 거죠. <도깨비>의 공유와 김신이 그랬고, <태양의 후예>의 송중기와 유시진이 그랬어요. 서로 많이 닮아 있죠. 배우 본인도 그걸 알고 있고. <미스터 션샤인>의 이병헌과 유진 초이는 어땠을까요? 유진 초이한테 이병헌의 모습이 있나요?
이 작품만큼 작가와 배우가 상의 없이 진행된 경우도 없을 거예요. 스물네 권의 책을 받아보면 궁금한 게 정말 너무 많을거 아니에요? 이게 뭔지, 이 대사보다 이게 더 나을지. 이제까지는 늘 대화를 하면서 만들어나가는 편이었거든요.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전혀 달랐어요. 그런 창구가 아예 없었어요. 늘 이응복 감독하고 얘기했지만 감독도 100% 제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책을 쓴 작가만의 세계란 게 또 있는 거니까. 그래도 이응복 감독은 꽤 잘 설명해주고 궁금한 것도 풀어주고 그랬어요. 김은숙 작가와 이응복 감독은 함께 오래 호흡을 맞춰왔으니까. 그럼에도 궁금증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죠.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초반 촬영 직전에 대본 네 권을 받았을 때가 김은숙 작가의 글에 대한 적응기였던 것 같아요. 나처럼 마초적인 드라마만 했던 사람한테는 더군다나. <올인>이나 <아이리스>만 해도 ‘나 남자야’ 하는 그런 드라마잖아요.

남자답게 사탕 주고받고.
(웃음) “합시다, 러브.” 이런 대사는 어떻게 하나 싶더라고요. 괜한 호기심으로 잘못된 결정을 했나. 그래서 고민 끝에 김은숙 작가와 한 번 통화를 했어요. 대본에다 질문거리를 잔뜩 체크해놓고서는. 그때 제가 미국에 있었거든요. 통화를 30분 정도 했는데

그래서요?
거짓말 안 하고 대답을 얻은 게 하나도 없어요. 답은 나름대로 해주셨는데 이해가 안 되기도 했고 대답을 회피하기도 한 것 같고. 아무것도 해소가 안 된 상태에서 통화가 끝났죠. 어떡하지. 이젠 제가 저를 설득시켜야 하는 상황이 돼버린 거예요. 그때부터 적응하는 데까지 시간이 꽤 길었던 것 같아요. 그다음부터는 일부러 전화를 안 걸었어요. 그냥 다 끝나고 만나봐야겠다 싶었죠.

24부작 드라마를 찍는 동안 작가와 배우가 한 번도 연락을 안 했단 말인가요?
네. <올인>과 <아이리스>를 찍을 때 최완규 작가와는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거든요. 제가 작가 방에 내내 붙어 있었죠. 그럼 작가도 자연히 이병헌이라는 사람에 대해 파악을 하게 될 것 아니에요. 말투나 성격 같은 걸. 그게 작품에 반영도 되겠죠. 그렇게 해서 애초에 작가가 의도했던 인물과 이병헌이라는 사람의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미스터 션샤인>은 제가 어느 정도 인물을 당겨왔는지, 반대로 제가 그쪽으로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간 지점에서 만나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분명한 건 김은숙 작가가 조금이라도 제 쪽으로 다가서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병헌이 다가갈 수밖에 없겠네요.
실제로 많이 다가갔던 것 같아요. 제 안에서 유진 초이를 꺼내려고 노력했죠. 어릴 때 캐릭터를 어떻게 만드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사람은 되게 악인일 수도 있고 천사일 수도 있고 바보일 수도 있어요. 한 사람 안에도 수천 수만 가지 캐릭터가 있어요. 이병헌이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지는 건 그중에서도 몇 가지 특출한 특징이 돌출돼 있기 때문이거든요. 하지만 제 안에는 드러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캐릭터가 잠재돼 있죠. 제가 배우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한테 모든 면이 골고루 있을 거예요. 배우가 캐릭터를 만든다는 건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자신도 몰랐던 부분을 꺼내서 극대화시켜 표현하는 거예요.” 연기를 해오면서 이 생각은 변하지 않고 늘 마찬가지였어요. 배우가 캐릭터를 표현할 때는, 만일 그 배우가 이해하고 표현했다면, 그건 배우 안에 있는 어떤 면을 극대화해서 표현한 거예요. 그게 없는데 표현한 거라면 그건 이해 못 한 상태에서 연기한 거고. 그러면 관객이나 시청자들도 가짜처럼 느끼고요.

배우도 알죠. 자신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그런 면에서 김은숙 특유의 언어유희를 직접 해보니까 어땠나요? 시청자들은 늘 좋아하지만 사실 실생활에서는 쓸 수 없는 말투잖아요. 자칫 정말 가짜 문어체처럼 들릴 수도 있어요.
그거 갖고도 처음 몇 개월 동안 정말 고민 많이 했어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내가 늙었나? 별별 생각을 다 했네요. 그런데 감독은 저보다 훨씬 세련되고 젊은 세대의 감각을 갖고 있는지 절 계속 안심시키더군요. “나중에 방송 보세요. 나오면 좋을 거예요.” 계속 그랬죠. 그래도 저는 의구심을 끝까지 놓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국 드라마의 첫 모니터링을 하면서는 어떤 느낌이었나요?
정작 방송이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제가 너무 습관이 돼 있었어요. 저 대사가 오글거린다거나 그런 게 별로 없었어요. 제가 이미 그쪽으로 너무 가버린 뒤였던 거죠.

이른바 은숙체의 기묘한 지점은 배우 입장에서는 현실감이 없어서 연기하기가 쉽지 않은데 시청자 입장에서는 위트가 느껴져서 중독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손석우 대표가 그 얘기를 하긴 했어요. 생각해보니까 이응복 감독도 비슷한 얘기를 했네요. 저는 정말 김은숙 작가의 대본대로 연기했거든요. 정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했어요. 물론 애드리브도 있었지만 극히 적었고요. 그런데 김은숙 작가는 아무 생각 없이 내뱉길 바라는 대사를 거꾸로 발버둥 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버려서 연기를 하니까, 거꾸로 김은숙 작가의 본래 의도와는 멀어지는 느낌도 받았대요. 저는 사실적인 연기를 해와서 그런지 몰라도, 어색한 이 대사를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해야겠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 연기 자체는 자연스러워 보였을지 몰라도 뭔가 팍 터지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와는 좀 멀어졌던 게 아닌가. 손석우 대표는 이런 측면이 보였다고 하더라고요.


클래식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시계로 앞뒤 면의 서로 다른 두 개의 다이얼이 특징인 리베르소 트리뷰트 듀오페이스 라지 예거 르쿨트르. 가죽 트렌치코트 김서룡. 니트 톰 포드. 바지 PT01.

평소에 이병헌의 연기는 정교하고 치밀하다고 봤습니다. 시나리오도 철저하게 분석하고 캐릭터에 대한 준비도 세밀하고요. 대표적으로 <남한산성>에서의 연기는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했어요. <남한산성>의 황동혁 감독도 이병헌의 연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틀림이 없었다고 했거든요. 그만큼 치밀하게 준비하고 정교하게 연기하니까 가능한 경지겠죠.
그렇지 않아요. 영화도 그렇고 드라마도 그렇고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때 정서를 이해하고 캐릭터의 형태를 잡고 나면 전 그걸 파고들려고 하지는 않아요. 자꾸만 파고들면 절제를 못 하는 순간이 생겨요. 제가 시나리오를 자주 안 보는 게 되게 의외라고 얘기들 해요. 그런데 정서를 갖고 있으면 어떤 대사를 줘도 그 캐릭터로 말할 준비가 돼요. 또 그래야 유연해져요. 막 파고들어서 계산하면 어깨가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연기에서는 순발력이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준비라는 게 다른 게 준비가 아니에요. 대사 잘 외우고 여기에서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게 아니에요. 그 캐릭터를 마음속에 갖고 있는 게 진짜 준비예요. 대사 몇 번 틀리면 다시 가면 돼요. 그 캐릭터를 갖고 있으면 작가가 써준 대사보다 더 좋은 애드리브가 나올 수도 있는 거예요. 작가가 맞겠지만 이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한 배우한테도 분명히 맞는 게 있거든요.

그 사람을 내 안에 담고 있다. 그런데 배우도 사람이잖아요. 일상을 살잖아요. 현장도 있지만 삶에서는 이병헌으로도 살아야 하죠. 그런데도 자기 안에 그 캐릭터를 담고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떤 사람은 현장에 와서 말도 잘 안 하고 감정 톤을 유지하려고 음악을 듣고 그렇더군요.
저도 일상을 살죠. 일상을 살긴 하는데 머릿속 한편에는 늘 그 캐릭터가 담겨 있어요. 작은 예를 들자면, 저도 가족이 있으니까 며칠 시간이 남으면 여행을 가기도 하거든요. 그때 흐트러지는 느낌이 있어요. 그리고 촬영 기간 사이사이에 일주일 정도 공백이 생기거나 하면, 그럼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그 정서로 젖어드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해요. 제일 좋은 건 3일에 이틀 촬영하거나 4일에 이틀 촬영하는, 비교적 쉬는 시간이 길지 않은 템포인 것 같아요. 그런 게 되게 좋아요. 그래서 작품을 하는 중이라면 긴 시간이 비어도 가능하면 여행은 안 가려고 해요. 여행은 또 다른 거더라고요. 집에서 쉬는 거랑은 달라요. 모든 것이 환기돼버려요. 공기부터 눈에 보이는 것까지. 전부 환기가 돼버리니까 젖어 있었던 게 씻겨나가는 것 같아서.

카메라 앞에서 보이는 것만 연기의 전부가 아니네요. 쉽지가 않네요.
세상에 쉬운 게 어디 있겠어요.

‘이병헌은 연기의 신이다.’ 인터뷰를 찾아보니까 거의 모든 인터뷰에서 이런 말이 나오더군요.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주로 어떤 대답을 했는지도 알고 있긴 합니다만.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아요. 요즘은 신이 너무 많아서.(웃음) 연기를 잘하는 사람을 두고 이렇게도 말해주는구나 싶죠. 그냥 좋은 칭찬으로 들으려고 해요. 그걸 부담으로 느끼는 순간 말 그대로 부담이 되니까. 좋은 것만 받아들여야지.

연기를 잘한다는 건 어떤 건가요?
저는 그런 표현을 해요. 제가 집에서 간혹 가다 독립 영화를 봐요. 저 친구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떻게 연기를 저렇게 하지 싶은 사람이 요즘은 너무 많아요. 이제 연기를 잘한다 못한다는 건 신선하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과 같이 영화를 보다가 연기를 너무 잘하는 친구를 보면 전 “저 친구 센스가 보통이 아니네”라고 표현해요. “진짜 센스 있다. 센스 있어서 좋다.” 저한테는 센스가 되게 큰 것 같아요. 그게 연기의 다는 아니지만.

말씀하시는 센스는 동물적 감각이나 본능이라는 요소의 다른 표현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병헌도 처음부터 연기를 잘했던 건 설마 아니겠죠. 언제 내가 연기의 센스가 생겼구나 느꼈나요? 그런 작품이나 시기가 있겠죠?
그게, 어떤 지점인지 잘 모르겠어요. 약간 애매한 게 저는 초반부터 연기를 좀 안다고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웃음) 그런데 매번 그 작품이 끝나고 몇 개월 있다가 다시 보면 진짜 못 봐주겠더라고요. 이런 상황이 반복돼요. 늘 연기를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는 그 순간의 내 생각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 당시에는 나도 제법 아는 것 같다고, 잘한 것 같다고 하지만, 조금만 지나고 보면 늘 그때 정말 왜 그랬지 싶거든요. 아쉽고. 그래서 그 순간의 제 마음 상태나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정말 믿을 게 못 되는 것 같아요.

어쩌면 그게 이병헌의 연기가 끊임없이 진화해온 동력 같네요. 과거의 나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
그렇게 포장을 멋있게 해주시면 고맙죠.(웃음)

그게 기자 일의 일부인걸요. 의미를 찾아내고 부여하는 것.
그렇다고 언제나 제 자신한테 만족 못 하고 사는 것도 좋은 건 아니거든요. 저는 정말 만족하면서 살려고 해요. 되게 낙관적이에요. 나름대로 열심히 했고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까 아쉬운 부분이 보이잖아요. 나 스스로 너무 모자라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보완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요.


시간을 측정하는 트윈 카운터와 세 가지 피니싱으로 마감된 입체적 다이얼이 돋보이는 폴라리스 크로노그래프 예거 르쿨트르. 셔츠 톰 포드. 바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병헌의 연기를 1990년대부터 봐왔던 것 같아요.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게, 2000년에 <공동경비구역 JSA>가 개봉할 때만 해도 배우 이병헌에 대한 기대가 높지 않았어요. 저의 개인적인 기대가 낮았다는 게 아니라 영화 기자들이나 대중문화 평론가들 사이에서 이병헌은 아직 배우로서 인정받은 존재가 아니었단 얘기예요. 사실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영화 자체에 대한 기대도 높지 않았어요. 가장 큰 이유는 박찬욱 감독. 당시만 해도 영화평론가로 더 유명했으니까. 실패한 영화감독이었고. 그리고 솔직히 송강호는 잘하는 거 알겠는데 이병헌은 과연 잘할까? 그게 영화 담당 기자들의 대체적인 여론이었어요. 기억나시죠? <공동경비구역 JSA>가 개봉도 하기 전에 사전 시사회를 한 달 넘게 한 것. 연기와 연출에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얘기겠죠. 정말 입소문이 엄청나게 났고. 기자들도 영화를 보자마자 이병헌의 연기에 놀라버린 거죠. 극장 앞에서 다들 이병헌 얘기만 하던 생각이 아직도 생생해요. 이병헌이 스타인 줄만 알았는데 배우였던 거예요. 이병헌은 스스로 연기를 깨우친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영화계가 이병헌이라는 배우를 재발견한 건 분명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잠시 생각) <공동경비구역 JSA>는 당시에 가장 크게 흥행한 영화잖아요. 어쩌면 비로소 스크린으로 대중이 제 연기를 많이 보게 돼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어요. 제 연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거죠. 어떤 변곡점 같은 거. 그런 거 있잖아요, 누가 잘한다 그러고 인기 있다고 하면 나는 못 봐서 모르겠다고 하다가, 어느 순간 다 같이 동화돼버리면서 인정하게 되는 순간. 그때가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 뒤로 이병헌과 함께 연기한 배우들을 죽 살펴보니까 이렇게나 많더라고요. 제가 필모그래피를 보면서 한 사람씩 다 써봤어요.
이걸 다 쓰셨네.

마치 이병헌과 연기를 해본 배우와 아닌 배우로 나뉠 정도로 많더군요. 기라성 같은 대배우도 한둘이 아니에요. 송강호, 최민식, 전도연, 심지어 알 파치노까지. 이렇게 리스트를 정리하면서 느낀 게 있어요. 이병헌이라는 배우는 상대 배우들과의 치열한 연기 대결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끊임없이 성장해온 게 아닐까. 이병헌 특유의 낙천성으로 누군가와 맞붙는 걸 절대 피하지 않았고, 그렇게 깨지고 이기고 어우러지면서 진화해온 게 아닐까.
어떤 기자분이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상대 배우가 너무 연기를 잘하면 부담스럽거나 꺼려지지 않느냐고. 저는 정반대예요. 영화든 드라마든 연기 잘하는 사람과 할수록 좋아요. 또 그래야 작품도 좋아져요. 그래야 사람들도 공감을 쉽게 하고. 작품이 잘돼야 배우도 인정받죠. 그리고 정말 많은 배우와 함께 작업해온 게 맞는데도 지금도 계속 새로운 사람을 만나요. 지금 촬영하고 있는 <남산의 부장들>에도 처음 뵙는 분이 너무 많아요. 주요 배역은 전부 처음 하는 분들이에요. 곽도원 씨, 이성민 씨, 이희준 씨. 이희준은 BH 소속이지만 현장에서는 처음 같이 해보고. 또 김소진. 그런데 다들 기가 막히게 연기를 잘해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해요. ‘이런 괴물들을 왜 내가 처음 보지. 그동안 한 번쯤 작품을 해봤을 법도 한데 어떻게 한 영화에서 다 처음 보지.’ 이러면서 되게 기분 좋은 긴장감이 느껴져요. 현장이 즐거워지고.

<내부자들>을 할 때는 조승우 씨의 뮤지컬까지 챙겨 보셨다고 들었어요. 뮤지컬 무대에서 보이는 조승우라는 배우의 힘을 느꼈고. 그래서 함께 작업하는 게 더 즐거워졌다고. 이병헌이라는 배우는 상대 배우가 강할수록, 연기를 잘할수록 자신도 강해지고 신이 나는 배우네요.
저는 확실히 그런 편인 것 같아요. 경쟁심이나 불안함보다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더 커요.

그래서 배우들과 한판 잘 놀았다고 표현하신 거군요.
그런 말을 처음 한 게 아마 <공동경비구역 JSA> 때였을 거예요. 그때 정말 그랬거든요. 결과적으로는 대작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게 될 줄 모르고 그냥 놀았거든요. 우리는 정말 현장에서 놀았던 것 같아요. 정말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어요.

<남한산성>을 보면 배우 이병헌의 또 다른 특징이 느껴집니다. 상대가 강하면 더 강하게 맞받아친다는. 여지를 두고 타협을 하는 게 아니라 강 대 강으로 부딪쳐서 최정상에서 균형을 찾는 방식. <남한산성> 자체가 김윤석과 박해일과 이병헌이라는 삼강 구도의 팽팽한 긴장감이 필요한 영화였지만, 거기에서 이병헌의 연기는 더 여지가 없더군요. 이병헌은 그러면서 얼마나 짜릿했을까 싶네요.
감독님도 당연히 그런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썼겠죠. 저와 윤석 선배와 해일이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더더욱 그 균형이 깨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그 영화가 산다고요. 만약에 윤석 선배보다 제가 약해 보였다면 후반에는 저를 살리려고 더 세게 저를 부각시키는 편집을 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전체적인 균형이 무너져요. 결국 현장에서 배우들이 최선의 최선을 다해야 영화가 사는 거였죠.

이러니 경험이 많지 않은 배우들은 이병헌이라는 배우를 만나면 기에 눌린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병헌이라는 배우는 항상 자신의 최대치를 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설 수 없다면 힘들어질 수밖에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게 있어요. 특히 업계 후배들한테서 훨씬 더 많이 느끼지만, 심지어 밖에서도 그런 것 같거든요. 저희 같은 배우들은 예민해서 상대방이 제 앞에서 심하게 떨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내가 액션 영화를 너무 많이 찍어서 그런가 생각하죠.(웃음) 왜 저럴까.

그래도 악역은 <지아이조>와 <놈놈놈> 정도잖아요.
처음에는 그런 떨림을 저도 잘 몰랐어요. 특히 우리나라는 깍듯한 선후배 문화라는 게 있어서 그게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도 보이거든요. 그런데 그 선을 넘어서 떨림이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그걸 간과하고 넘어갔는데, 제가 알 파치노와 연기해보고 나서 느낀 거죠.

떨림을?
알 파치노 앞에서 제가 떨어버린 거죠.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너무 긴장이 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기분인지 이제야 알겠다. 그 이후부터는 후배들한테 일부러 농담도 많이 하고 그래요. 미리 맞춰보기도 하고. 그게 도움이 될 것 같더라고요. 이 친구가 자기 걸 온전히 보여줘야 되는데 저 때문에 자기가 준비한 것의 반밖에 못 보여주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그렇다고 제가 알 파치노라는 건 아니지만. 이 신에 대한 기본적인 긴장감을 갖는 건 좋아요. 그런데 다른 긴장감이나 떨림은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미스컨덕트>에서 알 파치노와 처음 연기를 함께 했을 때 그렇게 긴장했다면서요. 알 파치노가 ‘괜찮으니까 그냥 계속하라’고 말했다던가요.
그게, 저는 알 파치노를 개인적으로 이미 알고 있었어요. 현장에서 처음 만난 게 아니었어요. 여러 번 밥도 같이 먹었고 와인도 한잔하고. 그러면서 알 파치노의 개인적인 에피소드도 듣고. 그래서 되게 편한 사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작품을 같이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어쩌다 보니 작품을 같이 하게 되고 배우 대 배우로 한 프레임 안에서 연기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긴장해버린 거죠. 대사도 몇 마디 안 되니까 정말 술술 나올 정도로 연습을 했는데 그 순간이 되니까 그 대사마저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배우는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해석한 걸 몸으로 표현해야 하니까요. 카메라 앞에서는 철저히 혼자인 거고.
제가 너무 당황스러워서 한국말로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아무도 반응을 안 하니까 영어로 다시 한번 가겠다고 하고. 제가 또 깜빡했던 게 뭐냐면 미국에서는 대사 실수를 해도 웬만하면 NG를 안 내요. 왜냐하면 다른 부분이 좋을 수도 있기 때문에. 어쨌든 중간 컷을 잘 안 하거든요. 우리나라는 중간에 누가 대사를 씹으면 그냥 컷 하잖아요. 미국에서는 그런 경우가 별로 없어요. 그냥 끝까지 가요. 아주 큰 실수가 아닌 이상. 그때 알 파치노가 복화술을 하듯이 계속 “다시 해. 괜찮아”라고 하더라고요. 표정 변화도 없이. 정신을 좀 차려서 다시 했죠. 그래서 여러 번 테이크를 갔더니 좀 나아졌어요. 결국 첫 테이크는 못 썼고 나중에 찍은 테이크로 오케이가 됐지만.

이병헌의 필모그래피는 그런 긴장감과 싸워 이겨내서 만들어진 거네요.
이제 카메라 앞에서는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긴장감 이외의 긴장감은 없어요. 그런데 무대 위나 라디오 생방송 같은 곳에서는 의외로 너무 심하게 떠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왜 그럴까 생각해봤어요. 캐릭터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설 때는 긴장감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반면에 온전히 이병헌으로서는 긴장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제가 아카데미 시상식의 시상자로 무대에 섰잖아요.


짙은 블루 컬러 다이얼과 브라운 카프 스킨, 섬세한 피니시가 돋보이는 제품은 스포티한 개성과 남성적인 감각이 결합된 폴라리스 오토매틱 예거 르쿨트르. 코트, 터틀넥 모두 톰 포드.

2016년 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 시상자로 나섰죠. 한국인 최초.
시상식 며칠 전에 LA에 가서 또 알 파치노랑 식당에서 밥을 먹었어요. 그때 정말 긴장돼서 죽을 것 같다고 그랬어요. 벌써부터 떨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알 파치노가 자기도 떨린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러더라고요. 정 그러면 한 신을 찍는다고 생각하고 연기를 하라고. 그 얘기를 하는 순간 저도 깨달은 거예요. 캐릭터를 입고 올라가는 순간은 긴장하지 않는구나. 물론 당시에는 도움이 안 됐어요. 당장은 적용이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만약에 그럴 수만 있다면, 이병헌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덜 떨릴 것 같기는 해요. 실제로 적용은 잘 안 되는데 힘은 되더라고요.

이병헌은 처음부터 강했던 사람이 아니라 점점 강해진 사람 같네요. 다들 이병헌이 처음부터 강했고 유머러스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유머를 의도적으로 하지는 않아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센스죠.(웃음) 솔직히 그렇게 긴장하는 저 자신을 보면서 바보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연기 경력이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고, 수십 수백 번 반복한 일인데 왜 아직까지 난 이럴까. 어떤 작은 상황에서 느껴지는 자잘한 감정들. 왜 큰 사람답지 못하게 여전히 이런 감정을 느끼나.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나. 누구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들이거든요. 그런데 여전히 그런 작은 감정을 느끼고 긴장하고, 무언가에 솔깃하고, 여전히 귀도 얇은 것 같고, 이런 느낌들이 저를 계속 예민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이것도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일 수도 있는데요. 그런 예민함이 꾸준히 저의 극단적인 센스까지도 깨워주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려고 해요.

한없이 연약한 영혼을 지닌 한없이 막강한 배우.
이제까지 많은 것을 겪었고 수많은 감정을 경험했으니 저도 담금질이 돼서 어떤 상황이 와도 무뎌지고 무던해지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죠. 그건 마치 마음에 굳은살이 박힌 것과 같은 거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극도의 예민함이 제 안에 아직 있어요. 아픈 것을 아픈 것으로, 상처를 상처로 받아들이는 예민함이 배우한테는 중요하거든요. 여전히 그런 연약함이 제 안에 남아 있다는 게 고마운 것 같아요.

그래서 이병헌은 지금까지도 멜로가 되는 남자 배우인 거죠.
사실 사랑의 작은 감정들은 어렸을 때 느끼는 감정일 수 있잖아요. 40대나 50대 이후 관객분들은 유치해 죽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러브? 허그? 딴 데 돌려.(웃음) 그런데 배우는 그런 감정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되살릴 수 있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넷플릭스 덕분에 <미스터 션샤인>을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됐잖아요.
되게 재미있는 경험을 하나 했어요. 식구들하고 미국에 갔어요. 촬영 끝나고. 저희 엄마도 모시고.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갔거든요. 저도 어렸을 때 가보고 처음 간 건데. 그런 데 가면 변장을 하고 사진 찍어주는 아저씨가 있잖아요. 거기에 드라큘라 분장을 한 아저씨가 있더라고요. 한 50대 정도였나. 우리 엄마가 난데없이 드라큘라랑 사진 찍자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식구들이 다 모여서 사진을 찍는데, 우리가 한국말로 얘기하는 걸 듣더니 한국 사람이냐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했더니 갑자기 “미스터 션샤인”이러는 거예요. “유진 초이” 그러고.

알아봤네. 역시 글로벌 스타.
아니더라고요. 처음에는 이 사람이 날 알고서 이러나 했는데 그런 것 같지가 않은 거죠. 그래서 <미스터 션샤인>을 보냐고 했더니 엄청 재미있게 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내가 유진 초이야”라고 했더니 너무 깜짝 놀라는 거죠. 그랬더니 막 뛰어가서 자기 휴대폰을 가져와서 같이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고. 원래 사진을 찍혀주는 아저씨인데, 거꾸로. 미국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드라마 제목에 캐릭터 이름까지 아는 사람을 만나니까 신기하더라고요. 영화 찍었을 때보다 더 알아보는 것 같더라고요.

애초에 할리우드에 가보겠다고 한 건 도대체 왜였어요?
호기심. 호기심이었어요. 그즈음에 제가 세 가지 작품으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어요. <놈놈놈> <지아이조> <나는 비와 함께 간다>. 당시만 해도 제가 정말 돌다리를 너무 심하게 두들겨서 돌다리가 무너질 정도였거든요. 뭐 작품 하나만 들어오면 한 달 이상은 고민하면서 할까 말까 하다가 웬만하면 안 하는 쪽으로 결정. 작품 하나하나가 되게 소중한 게 당연하지만 그거 하나 결정하는 게 되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쉴 때는 2년 이상 쉰 적도 있어요.

2년?
지금은 다작 배우처럼 됐지만, 어렸을 때는 왜 요즘 작품 안 하느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그때 제 앞에 놓인 작품이 3개였는데, 하나는 난생처음 해보는 다국적 작품이었죠. 물론 감독이 워낙 유명하니까 해볼 만은 하다 싶었는데, 작품을 읽어봐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고 이해도 못 하겠고. <놈놈놈>을 하게 되면 난생처음으로 악역을 해보는 거였고. <지아이조>는 난생처음 해보는 할리우드 액션 영화고. 전 처음엔 애들 만화영화인 줄 알았어요.

난생처음 하는 선택지가 3개씩이나.
처음엔 그중 하나만 할 생각이었죠.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다 하겠다고 결정을 한 거예요. 어느 순간 저를 유지하던 끈을 하도 잡아당겨서 툭 끊어져버린 거죠. 그때부터 모험이 시작된 것 같아요.

인생은 생각보다 짧잖아요.
맞아요. 그 생각을 했어요. 안 해보고 죽는 것보다는 뭔지 한번 해보기라도 하자.

배우는 언제까지 작품을 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직업이고.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가는 시점쯤일 텐데, 그즈음에 사고방식이 바뀐 거군요. 이병헌의 모험으로.
작품을 결정할 때 더 긍정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그 바람에 이젠 너무 다작 배우가 됐어요.(웃음)


42mm 핑크 골드 케이스와 브라운 악어가죽 스트랩이 조화를 이룬 폴라리스 크로노그래프 예거 르쿨트르. 네이비 슈트 재킷, 셔츠 모두 톰 포드.

다들 인생에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죠. 근데 나이를 먹으면서 달라지는 건, 목표 지점까지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가보는 데까지 가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는 거죠. 그냥 가보는 데까지 가보는 게 인생이구나.
저는 그런 생각이 되게 강한 사람이에요. 인터뷰할 때마다 당황스러울 때가 목표가 뭐냐고 질문받을 때예요. 저는 없다고 해요. 있었던 적이 없어요. 목적지도 없고요. 저도 원래가 그런 성향의 사람이지만 특히 배우라는 직업은 그런 목표가 무의미한 것 같아요.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매출액 목표가 있을 수도 있겠죠. 저희 일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고, 온전히 개인의 주관적 감성으로 작품을 선택하고 그게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길 바라야 하니까, 모르는 게 더 많을 수밖에요.

이병헌도 그러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거죠. 사람들은 이병헌이 엄청난 야심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야심이 너무 없어요. 지금까지의 길이 나쁘진 않아서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남자라면 야망과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전 정반대예요. 저도 저를 놓아버리는 순간부터 어딘가로 떠밀려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그냥 가는 거예요. 갈 수 있는 데까지.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인 예거 르쿨트르 얘기를 잠시 해볼까 해요. 스위스 발레드주에 있는 예거 르쿨트르의 그랑 메종에 다녀오셨던데요?
그곳은 뭐랄까, 세상과는 다른 공간 같은 느낌이 있어요. 아주 자그마한 마을이거든요. 그런 산속 시골 마을에 2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파인 워치메이킹 브랜드 예거 르쿨트르의 본사가 있는 거죠. 그렇게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세상 어느 누구도 모를 것 같은 곳에 누구나 알 만한 세계적인 시계 브랜드가 있다는 것, 그게 제일 신기했어요.

평소에도 예거 르쿨트르를 좋아하셨나요?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서 처음 차봤어요. 소품 팀하고 직접 가서 골랐죠. 그때 시계가 뒤집어진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리베르소. 멋지죠.
그때 제작진이 영화에서 찼던 시계니까 기념으로 가지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걸 여전히 갖고 있어요. 그때부터 예거 르쿨트르를 알았죠. 10여 년 됐네요.

그런 개인적인 스토리가 있으면 브랜드에 대한 애착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앰배서더 제안을 받았을 때도 반가웠을 것 같고.
예거 르쿨트르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아시아에서는 ‘예거’라고 발음하지만 현지에서는 발음이 전혀 다르다는 것도 알았어요. ‘제제’라고 하던가.

<남산의 부장들>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역할을 맡았죠. 곽도원 배우가 김형욱 중정부장. 이성민 배우가 박정희 대통령. 하지만 극 중 이름은 다르죠?
제가 맡은 배역의 이름은 김규평이에요.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과 다시 만난 걸로도 이미 화제작이네요. 한국 현대 정치의 미스터리인 김형욱 실종 사건을 다루는 걸로 알고 있어요. 결국 대통령 암살 사건까지 이어지나요?
다 나와요. 제가 이 작품을 고민하면서 감독과 제작진을 만났거든요. 제가 한참 고민하니까 왜 이 좋은 시나리오로 고민을 하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때 감독하고 그런 약속을 했어요. 이 영화가 사실을 왜곡하거나 어떤 편에 서서 어떤 색깔을 갖고 이야기를 다루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역사적으로 미스터리로 남은 건 영화에서도 미스터리로 남게. 미스터리를 가르쳐주는 영화라면 찍지 않겠다고 했어요. 예를 들면 김재규가 정말 대의를 위해서 그랬는지,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순간 실수를 해서 그런 건지, 그건 여전히 모르는 일이잖아요. 많은 다큐멘터리와 책이 있지만 그 답은 없어요. 물론 영화적으로 재미있게 만드는 건 있겠지만, 굵은 구조와 큰 이야기는 건들지 말자고요. 저는 그 얘기를 했고, 감독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해석은 보는 이들의 몫. 배우의 역할은 해석의 여지를 넓혀주는 것이겠죠.
감독도 누아르적 요소를 많이 넣었어요. 그러다 보니 영화를 보다 보면 정말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여러 느낌을 받게 될 거예요. 보고 나면 설전을 벌일 수도 있고 이런저런 해석이 나올 수도 있고.

아마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하고 나면 많이들 이병헌에게 물을 거예요. 김재규는 왜 그랬던 것 같냐고. 답을 달라고 하는 거죠.
제 답은 똑같을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겠어서 하고 싶었던 거니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병헌을 움직이는 힘 같네요. 모르니까 가본다. 가보는 데까지 가본다. 그래서 유진 초이한테 다시 묻는다면, 지금은 어느 쪽으로 걷고 계시오?
오늘은, <에스콰이어> 쪽으로 걸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