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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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NC인터뷰]MAD, COOL 이병헌의 김재규
등록일 2020-01-18 조회수 882
[뉴스컬처 이이슬 기자] 마른 침을 삼키고, 안경을 한번 들어 올린다. 심호흡하며 단정히 포마드한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올리는 김규평(김재규). 이병헌이 표현하는 이 모든 디테일이 '남산의 부장들'의 공기를 바꿨다. 이병헌의 입에서 '혁명'이라는 단어가 나올 땐 불처럼 뜨겁고, 과열된 충성에 목 메어 내달릴 땐 아이러니하게도 한없이 차갑다. 이병헌을 만난 김규평은 냉정과 열정을 번갈아 담금질하며 우아하게 살아났다.

이병헌은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영화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 개봉을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에서 작품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제2의 권력자라 불리던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 분)이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사건을 벌이기 전 40일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0분,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한다. 이는 18년간 지속한 독재정권의 종말을 알린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으로 기록됐다. 김충식 작가가 기자로 생활하던 2개월간 연재한 취재기를 기반으로 출판된 논픽션 베스트셀러가 원작이다. 우민호 감독은 방대한 원작 중 10.26 사건에 집중해 영화화했다.

 

 

이날 이병헌은 “영화를 선택할 때 먼저 이야기를 본 후 연기할 캐릭터를 본다. ‘남산의 부장들’도 김규평의 감정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라며 “섬세한 심리극, 인물 간의 갈등이 드라마틱하게 다가왔고 매력을 느꼈다”라고 출연 배경을 전했다.

 

또, 김재규(김규평)를 연기한 과정에 대해 이병헌은 “우민호 감독님과 카메라 테스트 전에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목소리, 말투 등을 비슷하게 연기하면 좋을지 물었는데, 그러지 않기를 바라셨다. 극 중 이름도 다른데 굳이 똑같이 안 해도 될 거라고 바라보시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이병헌은 “헤어스타일 등 중요한 몇 가지만 참고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시나리오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라며 “그가 왜 그랬는지는 영화가 끝나고도 여전히 논쟁이 펼쳐지고 이야기될 수 있지 않나”라고 강조했다.

 

이어 “여전히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이 많고, 자칫 ‘남산의 부장들’이 사실을 왜곡하거나 역사적으로 미스터리한 부분을 규정지어서는 안 된다고 봤다”라며 “역사에서 미스터리한 부분은 영화에서도 미스터리 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다 보니 어느 촬영보다 조심스러웠다”라고 털어놨다.

또, 이병헌은 박통(박정희)을 연기한 이성민과 곽 실장을 연기한 이희준에 대해 남다른 신뢰를 드러내기도. 먼저 이성민에 대해 이병헌은 “촬영을 하기 전에 집무실 세트장에 걸린 이성민을 그린 그림을 먼저 봤다”라며 “실존 인물인 줄 알았다. 그림을 보고 ‘헉’, ‘우와 어떻게’ 하는 느낌도 받았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병헌은 “그 기분을 뭐라 표현할 수 없었다”라며 “이성민을 촬영장에서 처음 봤을 때도 놀라웠다. 또 그때 느낀 감정이 2인자 역할을 하는 제 연기에도 분명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이희준과는 인상적인 액션(?) 호흡을 맞추기도. 둘의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의 결투는 큰 재미로 다가온다. 이병헌은 “‘네가 영화에서 큰 역할을 해냈다’라는 말을 전했다. 모든 인물이 긴장감 넘치는데, 그나마 이희준이 쉬어가는 포인트가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어 “이희준이 식사 시간마다 괴로워하는 걸 봤다. 숙제처럼 꾸역꾸역 먹고는 했는데, 촬영 중반쯤 밥양을 줄이더라. 일 때문에 살을 빼야 한다더라”라며 애정을 보였다.

 

이병헌은 ‘남산의 부장들’을 ‘달콤한 인생’(2005)과 닮았다고 전했다. 앞서 이병헌은 ‘달콤한 인생’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재평가받으며 주목받았다. 이후 영화는 할리우드 진출의 발판이 됐다. 당시 이병헌을 눈여겨본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이는 미국 진출로 이어졌다. 유독 누아르 장르에서 빛을 내는 이병헌이다.

 

이를 언급하자 이병헌은 “‘남산의 부장들’은 내가 한 작품 중 ‘달콤한 인생’과 가장 닮았다”라며 “누아르가 속 충성, 배신, 애증 등의 감정이 주를 이루지 않나. 그런 감정을 연기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늘 있다”라고 말했다.

이병헌은 ‘내부자들’에 이어 우민호 감독과 두 번째 호흡을 맞췄다. 이들의 조합은 강력한 시너지를 발산한다. 서로에 대해 잘 아는 배우, 감독의 만남이 두 번째 작업에서 빛을 내는 것. 특히 이병헌의 깊은 눈빛 연기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병헌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이야기다”라며 “영화의 매력은 겉으로 드러난 사건 깊이 카메라를 비춘다는 점이다. 각 인물의 감정의 결을 세심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봤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떤 영화보다 섬세한 연기가 요구됐다”라며 “자세한 심리묘사가 수반돼야 한다고 바라봤다”라고 덧붙였다. 이어 “대사를 몇 마디 하지 않은 채 절제하면서 내뱉을 때는 힘들기도 했지만, 한편 그런 지점이 영화와 인물의 미덕이라고 봤다”라며 “또 후반에 터트리는 부분이 있기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라고 말했다.

 

1991년 KBS 14기 공채로 선발돼 배우 생활을 시작한 이병헌은 올해 29년차. 곧 30주년을 눈 앞에 뒀다. 이병헌은 “배우로 계속 있을 수 있다는 건 아주 고마운 일이다. 축복받았다고 생각한다”라며 “늘 몸부림치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어 “신인 때는 조명 감독님들이 제 얼굴을 까다로워하셨다. 그로테스크하다는 말도 들었다. 심지어 짜증을 내는 조명 감독님도 계셨다”라며 “이후 세월이 흘렀고, 한 영화감독님이 다양한 얼굴을 가졌다고 해주셨다. 다행이다”라며 웃었다.

앞서 이병헌은 할리우드 진출을 이끈 대표 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바. 최근 전해진 미국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기생충’의 6개 후보 지명을 바라보는 소회가 남다를 터. 이에 관해 이병헌은 “10월, 11월에 미국 LA에 있었는데, 당시 영화 관계자를 만나 ‘기생충’의 뜨거운 반응을 전해 들었다. 온도가 굉장히 뜨겁다고 느꼈고, 본상도 기대해볼 수 있겠다고 느꼈다”라고 회상했다.

 

이어 상기된 표정으로 이병헌은 “본상 수상 가능성도 있지 않나.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란다”라며 “한국 영화 101년의 해에 기념비적 사건이 생긴다면 이를 발판으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후배들에게, 또 제게도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라며 진심을 눌러 담았다.

 

투표권을 가진 이병헌은 아카데미 회원이다. 한 번도 투표한 적이 없었다는 그는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투표할 예정이라며 눈을 반짝였다. 이병헌은 “2월 6일까지 온라인 투표 기간인데, 그전에는 DB를 보기 힘들어서 투표를 주저했다. 영어 자막이 있지만 해석하며 보려면 오래 걸리지 않나”라며 “이번에는 꼭 투표할 생각이다. 물론 투표는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남산의 부장들’은 1월 22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