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제목 [인터뷰①~③] 이병헌 "'남산의 부장들', 왜곡하거나 규정짓지 않았다"
등록일 2020-01-24 조회수 1090
충무로를 대표하는 배우 이병헌(49)이 올해 설 연휴에도 새 영화 '남산의 부장들(우민호 감독)'를 들고 관객을 찾아온다.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제2의 권력자라 불리던 중앙정보부장이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사건을 벌이기 전 40일 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한일 양국에서 약 52만부가 판매된 논픽션 베스트셀러 '남산의 부장들'을 원작으로 한다. '내부자들'과 '마약왕'을 만든 우민호 감독의 신작이다.

이병헌은 '내부자들' 이후 우민호 감독과 재회했다. '내부자들'로 707만명을 동원하며 역대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나선다. 극 중 중앙정보부장 김규평 역을 맡았다. 역사 속 인물 고 김재규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박통 역의 이성민 등 당대 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를 연기한 곽도원, 이희준, 김소진 등과 호흡을 맞췄다.

극도로 절제된 연출 속에서 숨 막히는 열연으로 114분간 긴장감을 유지한다. 1979년 10월 26일을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옮겨온다. 더는 잘해낼 수도 없을 것 같은 그이지만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과연 이병헌'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지난 연말 개봉한 '백두산'으로 8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흥행을 끌어낸 이병헌은 '남산의 부장들'로 연타 홈런을 노린다.   

[인터뷰①~] 이병헌 "'남산의 부장들', 왜곡하거나 규정짓지 않았다"

-'남산의 부장들'을 자평하자면.
"언론배급시사회 전에 감독님과 배우들이 다 와서 미리 봤으면 하더라. 그래서 기술 시사라는 걸 처음 가봤다. 기술 시사와 언론배급시사 버전에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변화가 있다. 너무 어두웠던 부분을 밝게 한다든가, 이런 부분이 있다.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 감독님에게 웰메이드 영화라고 말했다. 긴 시간을 후반 작업에 쓰다보니 잘 나온 것 같다. 영화를 찍고 나면 객관성을 잃기 때문에 '이 영화가 어떻다'라고 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건, 영화에 완성도가 있을 뿐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하다는 것이다."

-길지 않은 러닝타임에 많은 걸 담아내 놀랍다.
"우민호 감독이 '내부자들'·'마약왕'을 통해서 긴 이야기를 줄이는 게 영화에 해가 될 수 있다는 걸 크게 느낀 것 같다.(웃음) 이번에는 러닝 타임을 제일 많이 신경 쓰더라. 어떤 신은 아예 촬영하지 않았다. 그래서 편집된 신이 사실 많지는 않다. 혼선을 줄 수 있는 이야기들은 과감히 뺐다."

-'마약왕'의 실패 이후 우민호 감독은 정말 변했나.
"'내부자들' 때와 '남산의 부장들' 때가 달랐다.(웃음) 들떠있지 않고 집중하더라. '남산의 부장들' 촬영 중에 '마약왕'이 개봉했는데, 그래서 영향을 받긴 했나 보다. 촬영 중에 무대인사를 다녀오더라. 감독님 때문에 촬영을 쉬는 경우는 처음 봤다. 하하하."

-엔딩신 전까지는 계속 절제하며 연기한다. 쉽지 않았을 터다.
"제일 몸부림치면서 최선을 다했다. 터질 때 터지지만 답답하리만치 계속 누르고 자제한다. 그걸 표현하는 게 배우들에겐 큰 어려움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실제 근현대사 사건, 실존 인물에 더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 그대로 최선을 다해서 그 안에서만 연기하려고 했다."

-실존 인물을 연기한 것이 처음은 아닌데.
"근현대사의 실존 인물은 처음이다. '남한산성'과 '광해' 등의 작품에서 역사적 인물을 연기한 적은 있으나 바로 얼마 전의 근현대사 속 인물은 처음 연기했다. 여전히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우리 영화가 사실을 왜곡하거나, 역사적으로 미스터리한 부분들을 규정지으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촬영보다 조심스러웠다."

-어렵고 조심스러운 작품이었음에도 출연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시나리오에 담긴 아주 섬세한 심리, 인물 간의 갈등이 드라마틱하게 다가왔다. 그런 것에 매력을 느꼈다."

-김규평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하며 연기했나.
"시나리오에서 그려진 대로, 그 안에서만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다. 그가 정말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영화가 끝나도 계속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규정짓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 그 인물은) 사적인 감정들이 생겨나고, 복잡한 마음의 상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왜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갔을까. 이 장면을 어떻게 연기했나.
"무의 상태가 아니었을까 한다.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가장 긴장감 넘치는 부분이다. 제정신이 아닌 느낌으로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 나간다. 그 가운데 김규평은 두 번 정도 객관적으로 빠져나와 상황을 본다. 피에 미끄러져서 광경을 생소하게 보게 되는 순간과 차에서 피에 젖은 양말을 만지면서 피를 보는 순간이다. 주관과 객관을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다. 개인적인 생각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영화인데, 피에 미끄러지는 장면은 내가 아이디어를 내고 감독님과 상의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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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②] '남산의 부장들' 이병헌 "한국의 조커? 기분 좋은 영광"

-후반부 암살 신이 한 컷으로 연결돼 연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촬영할 때도 카메라 감독, 감독, 배우 모두 신경 썼다. 나눠 찍긴 했으나 길게 한 컷으로 촬영했다. 그래서 연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화가 나거나 긴장하면 김규평은 머리를 만진다. 이것 또한 특별히 설정했나.
"당시 법정 영상이 남아있다. 그 영상에서 실존 인물이 자라버린 긴 머리를 계속 넘기는 모습을 봤다. 머리 한 올이 내려와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함과 신경질적인 느낌이 (머리를 넘기는 행동에서) 보여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부분을 참고해 장치로 사용했다."

-실존 인물과 싱크로율을 맞추려고 했나.
"감독님과 카메라 테스트하기도 전에 그 부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심지어 목소리와 말투까지 감독님에게 '싱크로를 맞추면 좋겠나, 그냥 가는 게 좋겠나'하고 물었다. 감독님이 '그대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굳이 맞추지 않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헤어스타일과 안경 정도만 참고했다. 결과적으로 영화적인 느낌이 더 많이 묻어나도록 했다. 그 당시 인물이 가지는 감정 상태와 심리, 이런 것들과 최대한 닮으려고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자료들이나 다큐멘터리, 실제 영상들, 증언들까지 다 도움이 됐다. 실제 그 상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는 어려움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았을까'라고 상상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내면적으로 닮으려고 노력했다."

-이희준과 '막 싸우는' 신이 인상적이다.
"시나리오 읽을 때도 '이 촬영 어떻게 하지' 싶었다. 보통의 액션처럼 누가 때리고 피하는 합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붙들고 넘어지는 상황이다. 대사도 서로 엉키고, 극도의 흥분 상태다. 엉망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엉망이 됐다.(웃음) 엉망인 상태 자체를 감독님이 좋아했던 것 같다."

-이희준은 캐릭터를 위해 100kg까지 찌웠다. 이 모습이 촬영장에서 웃음을 주기도 했다던데.
"이 영화는 사실 캐릭터들이 심각하고, 심각한 상황이고, 진지하고, 긴장감 넘친다. 그나마 이희준의 캐릭터가 실소를 자아낼 수 있다. 살이 그렇게 많이 찌니까, 발성도 달라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희준의 원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도 소리를 지르면서 하니까 호흡이 딸리는지 숨넘어갈것처럼 연기하더라. 우리는 이희준을 아니까 촬영을 하면서 웃기더라. 헬기로 뛰어가는 장면에서 심각하게 연기를 해야 하는데, 뒷모습이 정말 웃겼다. 그렇게 설정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영화를 보자마자 이희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네가 정말 큰 역할을 이 영화에서 한 것 같다'고. 모든 인물이 다 긴장감 있고, 굉장히 극단적으로 심각한 상황인데, 그나마 이희준이 살짝 쉬어가는 포인트를 만들어준 것 같다. 촬영 당시에는 식사 시간마다 되게 괴로워하는 게 보였다. 잔뜩 갖다 먹더라. 꾸역꾸역 숙제처럼 먹는 모습이었다."

-이성민과의 연기 호흡은 어땠나.
"이성민과 연기를 하기 전에 집무실에서 처음 그림을 봤다. 이성민을 그린 그림이었다. 정말 누군지 몰랐다. 실존 인물인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이성민이더라. 그림을 보고도 '헉'하는 느낌이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실제 이성민을 촬영장에서 처음 보고 놀라웠다. 이인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감정이 분명 도움이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조커라는 호평도 있다.
"그런 이야기 처음 듣는다.(웃음) 그럼 저도 아카데미에서 (상 받을 수 있나). 하하하. 굉장히 기분 좋은 칭찬이다.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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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③] "완벽한 형태·믿고 보는·일인자" 이병헌의 수식어들

-가장 연기하기 어려웠던 신은 무엇인가.
도청 장면도 중요한 신이었고, 극장 장면이 계속 교차되는데, 대사 한마디 없다. 아주 극단적인 감정이 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진짜 제정신이 아닌 느낌이고, 내 안에서 자신과 싸우는 느낌을 대사 없이 표현해야 했다. 그 시퀀스가 아주 힘들었다

-절제하는 연기의 어려움은 무엇인가.
"대사를 몇 마디 하지 않고, 절제해야 할 때는 훨씬 더 디테일하게 대사 속 감정이 전달돼야 한다. 힘들긴 한데, 한편으론 그런 지점이 이 영화 속 이 인물의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결국 터뜨리는 부분이 있다. 그 역할이 그렇기 때문에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기에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은 겉으로만 알고 있는 사건에 깊숙이 카메라가 들어가 세심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영화보다도 섬세한 연기가 필요하고, 섬세한 심리 묘사가 필요하다."

-누아르 장르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간 출연했던 작품들 중에 감정들이나 정서가 가장 닮은 것은 '달콤한 인생'이 아닐까 생각했다. 누아르 안에 충성과 배신, 애증, 이런 여러 감정이 주를 이루지 않나. 그런 감정들을 연기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나.
"기분 좋은 칭찬이기도 하고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배우의 이름을 보고 극장에 간다는 건, 그런 배우로서 있을 수 있다는 건 감사하고 축복받은 일이다. 이런 배우로 성장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늘 일인자였기에 이인자의 마음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도 같다.
"일인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웃음) 그렇게 살면 정말 숨 막힐 것 같다. 부담감이 있다. 첫 번째, 두 번째를 나누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숨 막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곽도원은 '가장 완벽한 형태의 배우'라고 극찬했다.
"농담으로 들렸다. 아무튼 근데 너무 고마웠다. 저는 낯뜨거워졌지만 좋은 칭찬이어서 감사했다. 칭찬에 후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하하하."

-'백두산'과 개봉 시기 차가 불과 한 달 남짓이다.
"'백두산'도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배우는 자기가 했던 역할에 대한 열정이 다 있다. 어떤 영화든 캐릭터도 좋아하는 영화 팬들이 있지 않나. 그 인물을 가슴에 담아놓고 있는 관객도 있다. 너무 연달아 나와 아쉽긴 하다. 두 편의 영화가 같은 날 개봉하는 사람(이성민)도 있는데, 뭐. 그런 것에 비하면.(웃음)"

-흥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예상하나.
"흥행은 정말 모른다. 내가 하는 어떤 영화든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할리우드 진출을 이미 오래전 이룬 배우로서, '기생충'의 선전을 어떻게 바라보나.
"지난해 10월과 11월에 LA에 있었다. 그때 현지 영화 관계자들을 만났는데 '기생충'을 향한 온도가 뜨겁더라. 본상을 기대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본상 수상 가능성이 있지 않나. 정말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영화 101년이 됐는데, 기념비적인 사건이 생기면 그걸 발판으로 뭔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앞으로 후배들에게 큰 힘이 될 거라고 본다. 아카데미 회원이지만 그간 한 번도 투표해본 적은 없다. 이번엔 투표하려고 한다. 힘을 보태주고 싶다."

-설 연휴는 어떻게 보낼 예정인가.
"항상 어머니 집에서 설 연휴를 보낸다. 제사를 지내고 산소에 찾아뵙는다. 이게 명절마다 지키는 루틴이다."   

박정선 기자 park.jungsun@jt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