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병헌에게 올해는 남다른 해다.
세계를 향한 다국적 프로젝트의 결실이 겉으로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 할리우드 진출작 < G.I.조 >로 호평을 받고 흥행까지 성공했다. 10월 15일 개봉되는 영화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서는 미국의 조쉬 하트넷, 일본의 기무라 타쿠야와 공동주연을 맡았다.
최근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에 한창인 그의 얼굴은 한결 수척해져 있었지만 기운만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1997년 <지상만가>에서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꿈을 꾼 배우 지망생으로 출연했지만 12년만에 당당히 할리우드에 입성한 덕분일까.
이병헌은 < G.I.조 >의 흥행에 대해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저 바보 가 자기 자리에서 하던 것만 잘 하지 왜 웃음거리가 될까, 이런 소리 들을까 걱정했어요. 처음 칭찬받고도 인사말인줄만 알았어요 라며 행복하다는 말을 두 차례나 했다.
데뷔 20년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도전하는, 소나무 같은 배우가 바로 이병헌이다.
# 악한 이병헌
이병헌은 공교롭게도 세 작품 연속 악역을 맡았다. 지난해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창이, < G.I.조 >의 스톰 쉐도우에 이어 이번 영화에서 연기한 홍콩 마피아 두목 수동포까지 모두 피도 눈물도 없는 악한이다.
이번 역할이 가장 잔인한 것 같아요. <놈놈놈>에서는 시각적 잔인함이 컸고, < G.I조 >에서는 외향적이고 오락적인 악인이었다면 이번에는 분위기가 잔인해요. 뼛 속 깊이 악역이랄까요. 바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내면의 분노, 폭발이 무표정 속에서도 전달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죠.
이번 영화에서의 악역은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을 가르는 게 아니다. 인간의 심리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커 연민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트란 안 홍 감독의 아내와 베드신을 해야 해서 진땀을 뺐지만, 이번 작품처럼 카타르시스를 여러 차례 느낀 작품이 있나 싶다.
상대역인 릴리가 납치되어 찾아 헤매다 상실감에 젖어 그 여자가 있던 공간에서 생각에 잠기는 장면이었어요. 감독님이 별도의 디렉션을 주지 않았고 제 감정에 충실하면 되었죠. 곰팡이가 핀 도너츠를 먹어 보기도 하고, 마약을 주사했던 주사기를 손가락에 찌르기도 하고, 팔에 묶었떤 고무줄을 목에 묶기도 하는데 어느 순간 눈물이 왈칵 났어요. 그 순간은 제가 연출이 되었죠. 아쉬운 건, 편집이 되었다는 거지만요, 하하.
# 인간 이병헌
이병헌은 할리우드의 레드 카펫을 밟으며 영어 실력으로도 화제를 모았었다. 영어는 18세에 학원에서 배운 것이 전부이지만 일어 러시아어 불어 등 외국어를 배울 때 발음이 좋은 편이다.
쟤는 못하는 게 뭐야? 이런 시선이 있는데 전 구기 종목을 진짜 못해요. <놈놈놈> 때도 틈나는 대로 축구를 했지만 제가 가장 눈에 띄지만 제일 못했어요, 하하. 대학 때도 제가 있던 불문과와 이영애가 있던 독문과가 불독 체육대회 를 열곤 했는데 체육 대회 이후엔 제 인기가 떨어졌어요, 하하.
이미 영화 <히어로> 등에서 호흡을 맞춘 기무라 타쿠야를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 오도록 하는 데에도 큰 몫을 했다. <놈놈놈> 홍보차 일본을 방문해 기무라 타쿠야가 진행하는 <스마 스마>에 출연해 짬나는대로 설득했다.
제가 잔소리를 많이 했죠. 나도 이렇게 일본에 오는데, 나는 안 바쁘냐,며 5번 이상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라디오에 출연해 제가 이야기를 해서 한국에 잠시 다녀와야겠다고 했다더군요.
# 배우 이병헌
이병헌은 최근 메소드 연기 가 각광을 받는 데 대해 자신은 중간이라고 말했다.
살을 빼거나 무엇을 배우는 건 배우의 연기적 측면의 능력과 별개가 아닐까 해요. 육체적 노력인거죠. 반대로 정신적으로 노력을 할 수도 있죠.
유지태는 <올드보이> 당시 박찬욱 감독에게 캐릭터에 맞게 금욕생활을 하겠다고 했었다는데 그건 정신적인 노력에 가까운 것 같아요. 전 어느 것도 존중해요. 너무 과하지 않은 쪽을 선호해요.
이병헌은 진심을 담은 연기가 통한다고 믿는다. 이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기무라 타쿠야와 함께 출연해야 했다. 한국 배우나 감독이라면 어떤 감정과 어떤 호흡으로 해야 할지 자세히 이야기를 나눴겠지만 느낌을 믿기로 했다. 촬영 후 트란 안 홍 감독이 한참 있다 눈물을 닦으며 나오는 모습을 보고 언어 소통에는 한계가 있지만 감정으로 소통했구나 생각하며 묘한 흥분을 느끼기도 했다.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어떤 감정을 안에 갖고 있으면 (주먹을 가슴 앞으로 가져다 대며) 말이나 표정이 없어도 전달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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