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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병헌, 카메라 앞의 완벽함 그 너머의 진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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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9.01.16 조회수 1865 | |
1991년 데뷔했으니 어언 데뷔 17년차. 출연작은 40편을 훌쩍 넘는다. 그러나 배우 이병헌이 누구인지 갈피를 잡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많고도 다양한 작품은 그를 더욱 헷갈리게 하는 일등 공신이다. 만인의 연인으로 녹아버릴 듯 달콤한 미소를 짓던 그는 폐부를 찌르는 강렬한 눈빛을 던지기도 하고, 브라운관에서 눈을 뗄 수 없는 흥행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가 마니아 감성이 풀풀 풍기는 영화에 떡 하니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 종잡을 수 없음은 이병헌이란 배우의 넓은 스펙트럼을 드러내기도 하고, 그 자체로 이병헌의 매력이 되기도 한다. 다음달 17일 개봉을 앞둔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감독 김지운·제작 반짝반짝)은 이병헌의 스펙트럼을 한단계 더 넓히는 작품이 될 터다. 이병헌과 송강호, 정우성로 이어지는 유명한 캐스팅 덕에 그가 '좋은놈'도 '이상한놈'도 아닌 '나쁜놈'이라는 것은 많은 영화팬들이 알고 있는 사실. 그러나 정작 이병헌의 나쁜 놈 연기는 무려 17년만에 처음이다. 더욱이 이병헌은 화끈하게도 3편의 영화에서 연달아 악인의 모습을 선보인다. '놈놈놈'은 물론 앞서 결정한 트란 안 홍의 인터내셔널 프로젝트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첫 할리우드 진출작 '지 아이 조'에서도 그는 악역이다. 한국은 물론 일본의 뭇 여성들까지 가슴 설레게 한 그윽한 눈빛은 당분간 못 보는 셈이다. "그윽함, 부드러움, 이런 거랑은 담을 쌓은 것 같아요. 어떻게 악역만 연달아 하다 보니까. 역할에 몰입해서 젖어들었다 이런 얘기는 좋게 들리지만 이젠 빠져 나올 때도 됐는데 여전히 옛 눈빛이 안 나온다고 하네요. 아직도 눈이 무섭다고, 못돼 보인다고. 이걸로 고정되는 게 아닌가 싶기까지 해요." 이병헌 하면 감미로운 눈빛, 이런 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그가 맡은 역이 악역이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선 자신을 모르는 감독이 이병헌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막연한 기대감이 컸고, '지 아이 조'에서는 지금껏 맛보지 못한 색다른 경험에 끌렸다. "'놈놈놈'은 김지운 감독에 대한 믿음이 가장 컸어요. 악역을 한 번 해보는 건데, 다들 도전 도전 하시지만 대단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모든 배우는 한번쯤 해보고 싶어하는 역할이죠. 하지만 그런 호기심만으로 연기를 할 수는 없지요. 거기에 책임감이 있어야지, 저 혼자 만족해서는 할 수 없으니까." 그 책임감의 결과 중 하나가 잔근육으로 뒤덮인 이병헌의 뒷모습이다.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누벼야 하는 '놈놈놈' 촬영은 눈에 훤한 고난의 행군. 그러나 크랭크인을 2개월여 앞둔 지난해 초 이병헌은 왼쪽 발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도저히 안되겠다'는 마음에 전화한 김지운 감독은 "빨리 나아서 같이 가자"고 먼저 선수를 쳤다. "수능시험 100일을 앞두고 눈이 안보여서 '엄마 재수할게요' 했는데 엄마가 '어머, 되는 데까지 해봐라' 하신 셈이죠. 막상 그 상태가 되면 일종의 패닉상태가 돼요. 내가 뭘 할 수 있지? 내가 뭘 해야하나. 그냥 깁스한 채로 운동을 시작했어요. 약 3개월을 했죠." 작품을 대하는 이병헌의 이런 철두철미한 모습은 늘 단정한 그의 몸가짐이나 신중한 어법 등과 맞물려 뜻하지 않은 오해를 불러오기도 한다. 카메라 앞에서 친구들과 이야기하듯 내키는 대로 내뱉고 뒹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요즘의 연예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가끔씩 '완벽주의자 같아요', '흐트러짐이 없을 것 같아요'라고 하곤 해요. 세상에 흐트러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 내가 그동안 잘했구나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내 의도와는 다르게 날 받아들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늘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머리를 단정히 빗고, 분을 발라 얼굴 광택을 죽이고, 목소리를 다시 가다듬어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 배우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배우란 집 앞 구멍가게를 갈 때도 몸가짐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이병헌은 믿는다. 다만 그 진심을 몰라주는 것이 가끔 아쉬울 뿐이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건 굉장히 다른 두가지 반응을 불러오는 것 같아요. '쟤는 왜 이렇게 가식적이야' 이런 것 하나, 또 하나는 '평상시에도 저러나?' 카메라 앞에 있다고 해서 내가 가식적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죠. 다만 카메라 앞은 불특정 다수의 앞과 같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하지만 이제는 헷갈려요. 그게 맞다고 나름대로 생각해 왔는데…." 이병헌은 자신과 가장 닮은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1992년작 '내일은 사랑'과 2006년작 '그해 여름'을 꼽았다. '내일은 사랑'에선 이를 드러내고 시원하게 웃던 순수한 대학생 범수의 모습이 가물가물, '그해 여름'에선 아직 서툴지만 구김살 없이 씩씩하던 농활대 학생 석영이 분명하게 또렷하게 떠오른다. 가만히 옛 작품을 더듬던 이병헌의 얼굴에도 조용한 미소가 번진다. 이병헌은 결코 한가지 모습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화가의 손에서 이병헌이라는 물감이 어떤 빛을 낼 것인지가 늘 궁금한 배우고, 뒤늦게 할리우드를 노크하면서도 "늦은 게 어딨어, 지금 안하면 후회할 일들이라면 부딪혀보자"고 스스로를 설득한 모험가다. 그의 변화는 늘 기대가 된다. 지난 17년의 세월이, 40여편의 영화가 그 기대를 보증한다. '놈놈놈'의 마적단 두목 창이든, '지 아이 조'의 닌자 스톰 셰도우든,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의 갱스터 두목이든 상관없다. 더한 악역도 괜찮다. 부드러운 빛을 띠든 악랄하게 번득이든 점점 더 깊어져 가는 이 남자의 눈을 우리는 아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