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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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BH & RUBEURS 입니다.

제목 [이병헌] “새로운 악당이 나타났다고 말해주면 족해요”
등록일 2009.01.12 조회수 2006

뭘 그리 놀라요? 눈매가 변했다고? 무리도 아니죠. 일년 동안 악역만 셋을 연기했다고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창이, <아이 컴 위드 더 레인>의 수동포, 그리고 얼마 전 촬영 끝난 [G. I. 조]의 스톰 섀도까지 셋. 하도 눈에 힘을 주다보니 눈이 찢어졌다는 말 들어요. 으흐흐. 매니저가 그러데요? “형, 이제 멜로는 못하겠다.” 악역이 겹쳐 수월할까 했는데 웬걸 악한 캐릭터끼리 미세한 차이를 만드는 어려움이 있더라고요. 말하자면 <놈놈놈>의 ‘나쁜 놈’ 창이는 잔혹한 짓을 저질러도 관객은 낄낄거리면서 보아야 하는 인물이에요. 왜 <장화, 홍련>에서 처음 귀신 나오는 대낮장면 기억하죠? 엄청 무서운데 웃음이 비식 새나오는 그런 느낌. 김지운 감독과는 <달콤한 인생>을 찍은 이후 일을 떠나 친구처럼 지냈어요. 같이 커피도 마시고 혼자 가기 버름한 영화 시사회 있으면 감독님이 연락도 하고요. <놈놈놈>이 2년 전부터 송강호 선배와 감독님이 의논해온 프로젝트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어요. 저야 “강호 형은 하여간 진짜 동작 빨라”, 우스갯소리나 했죠. 사실 <놈놈놈>은 ‘이상한 놈’이 주축이 되고 양쪽에서 강한 두 조연, 좋은 놈과 나쁜 놈이 받쳐주는 구조예요. 감독님과 마케터는 셋의 균형을 맞추려고 애쓰겠으나 뼈대는 뼈대죠. 그래서 출연에 고민이 없지 않았어요. 일단 사양했는데 (상처 잘 받는) 김지운 감독이 자꾸만 말미를 주는 거예요? 한번만 더 생각해봐라, 마지막으로 이틀만 더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하하. 결국 “서로에게 상처가 안 됐으면 좋겠다”는 짐짓 부담 팍팍 주는 농담을 날리며 합류했죠. 흐흐. 평소 우리나라엔 왜 <아웃사이더스>나 <오션스 일레븐> 같은 영화가 없냐고 불평해온 터에 막상 기회를 회피하는 것도 찜찜했어요.

그런데, 창이가 되기도 전에 일찌감치 독해져야만 했어요. 한창 승마 연습을 할 시기에 발목을 분지르고 개한테 손을 물렸거든요. 곤경을 끝까지 밀어붙여 어떤 상황에서 촬영이 시작되나 어디 보자. 그런 오기가 생겼는지 성치 않은 몸으로 훈련과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처럼 악에 받친 감정이 창이에게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죠. 황량한 중국 둔황 로케이션에 떡 도착했는데 내가 작구나, 모래 알갱이만하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어요.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인간들의 육체적 고난과 험한 삶을 그려봤어요. 그들 눈에 현대인들의 고역은 엄살에 불과하겠죠. 창이는 오직 최고가 되기 위해 사는 놈이에요. 해결사로서 의뢰받은 일을 반드시 철두철미하게 완수하는… 건 아니죠. 흐흐. 기분에 맞으면 하고 수틀리면 관둬요. 임무를 수행하다가도 이거 맞수다 싶은 놈을 만나면 내팽개치고 그놈 쫓아가요. 현실감각 없고 꿈을 좇으며 사는 인물이라 딱하기까지 해요. 뭐, 오락영화니까 그것까지 관객이 봐주진 않겠죠? 주무기는 칼인데 총까지 안 써도 너 정도는 이긴다는 과시도 깃들어 있죠.

<달콤한 인생>이 표정이 중요한 누아르였다면 <놈놈놈>의 창이 역은 희로애락을 뒤틀린 형태로 표현하는 재미가 컸어요. 1인 주연을 한 <달콤한 인생> 현장에서 인물에 대해 감독님과 거침없이 대화했다면, 이번엔 말을 꺼내다가도 “참, 셋의 균형이 맞아야지” 하면서 꿀꺽 삼킨 적이 많았죠. 부잣집에서 어려움없이 자란 애랑, 가난한 집에서 눈칫밥 먹으면 자란 애가 약간 다르잖아요? 흐흐. 송강호 형과는 <공동경비구역 JSA>에 이어 두 번째 공연이죠. 극중 인물 관계는 딴판이었지만 현장 풍경은 <공동경비구역 JSA>와 똑같았어요. 같이 살다시피하며 밤마다 맥주 몇병 놓고 하염없이 이야기하는 거죠. 강호 형 방은 아예 문도 비죽이 열어놓아 지나다 술 생각나는 사람들이 주막처럼 들락거렸어요. 그리고 축구! 무술팀과 배우팀으로 나눠서 하다가 나중엔 각팀이 합류해 하루에 세 게임 뛴 날도 있었어요. 얼마나 운동을 많이 했냐면 촬영 내내 종일 말 달리다가 일 끝나면 또 달려서 숙소 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배우와 스턴트맨 전원이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게 아닌가 착각했다니까요? 이왕 고된 생활 차라리 몸을 아예 새로 만들자는 생각이었나봐요. 그냥 거듭나버리는 거지. 하하하.

<놈놈놈>에 걸린 기대의 무게는 뒤늦게 실감했어요. 칸영화제는 그 정점이었죠. <달콤한 인생>도 칸에 갔지만 하필 <스타워즈>팀 다음 순서였어요. <스타워즈>팀이 썰물처럼 손님까지 다 휩쓸고 지나가, 잔해만 남은 칸의 거리를 감독과 배우가 표표히 걸었죠. 근데 올해 <놈놈놈>의 갈라 상영은 전혀 대접이 달랐어요. 영화 끝나고 10분간 박수를 치는데 이거 따라 쳐야 할지 계속 인사해야 할지 난감한 시간이었어요. 감독님은 어찌나 비지땀을 흘리는지! 바셀린 로션이라도 바른 줄 알았어요. 영화 보고 난 소감? 남들은 잘했다는데 저는 “당한 건가?” 하는 생각도 살짝 했죠. 우하핫. 최고 아니면 안 되는 창이 캐릭터에 심하게 빠졌나봐요. 국내 개봉판은 몰라요. 후시녹음하면서 본 내 장면만으로는 전체를 가늠할 수 없죠. 강렬할 수밖에 없는 ‘이상한 놈’과 멋질 수밖에 없는 ‘좋은 놈’사이에서, 악인으로서 대등한 힘과 매력을 보여준다면 그걸로 나는 충분히 이룬 거라고 생각해요. 누군가가 “새로운 악역이 왔다”고 말해준다면 족해요.

글 : 김혜리 
사진 : 서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