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제목 [김지수의 인터스텔라]길을 만드는 배우 이병헌 "한때 나도 갈팡질팡하는 '인조' 같았다"
등록일 2017-10-21 조회수 746
“한때 인조 같은 ‘결정장애' 성격… 에라 모르겠다, 내려놓으니, 할리우드 신세계 열려"
“어찌 될 지 모르는 상황에 수시로 나를 던지고 뭘해도 운명이라고 생각"
“영화 ‘남한산성', 김훈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최명길의 세계와 닿아”
“캐릭터는 조금씩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툭 하고 오는 것"
“연기는 지능이 아닌 센스… 외모 전성기 지나도 연기력은 나이 들수록 좋아져"
“자연인 이병헌으로 무대 서는 건 여전히 두려워… 신경안정제 먹는다"


김훈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남한산성’에서 그는 마치 작가 김훈의 페르소나 같았다./사진 제공=BH엔터테인먼트

영화 ‘남한산성'에서 이병헌은 평정한 말투로 다급함을 말했다.
“전하, 사나운 적이 가까이 올수록 사직의 앞길은 먼 것이옵니다… 지금은 대의가 아니옵고 방편에 따라야 할 때입니다. 불붙은 집 안에서는 대의와 방편이 다르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병헌을 보면서, 이병헌을 보고 있을 소설가 김훈을 생각했다. ‘치욕을 긍정해야 자존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작가 김훈의 평생의 화두였는데, 저것이 드디어 말이 되어 나오는구나. 언어는 풍경을 대체할 수 없는데, 한 배우의 목울대가 숨구멍 없이 엄숙하기만 했던 자음과 모음에 숨통을 여는구나.

영화 ‘남한산성'은 실패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1636년 인조 14년 12월. 눈보라를 뚫고 압록강을 건너온 청의 기마 부대를 피해 임금과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숨어든다. 갇혀 있던 47일 동안, 말의 불꽃은 치열했다. 청과 화친하여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주화파 최명길(이병헌)과 대의를 위해 맞서 싸워야 한다는 척화파 김상헌(김윤석)의 한판 ‘썰전'을 듣고 있자면, 그 ‘말의 황홀경'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특별히 나는 이조판서 최명길을 연기한 이병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화선지에 번져가는 먹물처럼, 우주에서 회오리치는 은하수처럼, 영화라는 땅에 온전히 뿌리내리고 열매 맺은 그의 육체를 보는 일은 경이로웠다. 예컨대 어떤 새로운 도전을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목격하는 게 아니라, 이미 완성된 찬란한 유적지를 보는 느낌이랄까.

대체 어떻게 저런 목소리로 말하고 저런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볼까?

“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초라한 세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고자 하옵니다. 전하의 성단으로, 신의 문서를 칸에게 보내주소서.”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가셔야 할 길바닥이옵니다.”-영화 ‘남한산성' 중 최명길의 대사.

폭력적인 영화조차 이병헌이 들어가면, 멜로드라마틱해진다. ‘남한산성'에서 ‘왕이 능욕을 당해야 백성이 산다'고 칼날같은 말을 던질할 때조차 체액이 고인 이병헌의 육성은 ‘사랑의 밀어'를 말하듯 왕과 백성에 대한 연민으로 그윽했다. 칼을 들어 상대가 아닌 자신을 찌르면서도 자아가 훼손되지 않는 기이한 풍경. 그걸 ‘순열’이라 할까, ‘순진'이라 할까.

예컨대 르포나 소설처럼 사실적이고 산문적으로 연기하는 배우가 있다면, 이병헌의 연기는 순식간에 감정의 핵심에 도달해버린 시에 가깝다. 일찍이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시에는 시의 이름으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는 야금술의 길이 있고, 시 아닌 것을 모아 시를 만드는 연금술의 길이 있다'고 했는데, 이병헌의 연기에서 야금술과 연금술의 협연을 본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병헌이 ‘내부자들'이나 ‘광해, 왕이 된 남자'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겁에 질려 똥을 싸고 어쩔줄 몰라 비명을 질러댈 때나, ‘밀정'이나 ‘남한산성'에서 공포를 이긴 범상한 영웅으로 신념을 말할 때, 한 인간 안에 깃드는 동심과 이상향의 풍경에 훅하고 발이 빠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연기 세계가 깊어지는 이병헌, 작품을 대하는 눈이 갈수록 ‘맑고 직관적인' 배우를 만났다. 벌집처럼 공고하게 자기 세계를 구축해간다고 믿었던 이병헌은 기실 자기 역사가 ‘우연과 카오스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혹시 일기를 씁니까?

“몇 년에 한 번씩 써보곤 합니다. 내가 죽은 후라도 ‘이병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오해 없이 알아줬으면 해서요. 그런데 쓰다 보니 꼭 초등학생 일기장 같아서 그만뒀습니다(웃음).”

-이병헌 연기의 원형도 일종의 ‘순진성’이지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무당이 신 내린 상태는 아닙니다(웃음).”
-확실히 자기 안에서 타인을 끌어내는 직관이 남다릅니다.

“생각해보면 캐릭터는 시곗바늘이 재깍재깍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쌓이는 게 아니더군요. 어느 순간 툭 가까워지고, 또 한 번 툭 가까워지곤 합니다.”

-‘남한산성'의 최명길은 어땠습니까? 시각적으로는 수염이 낡고 파삭해서 금방 부서져 버릴 것 같았습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장면에 강풍기까지 틀어내면 수염이 뒤집어져 얼굴을 뒤덮기도 했지요(웃음). 육체를 크게 사용하는 장면은 없었지만, 배역에 젖어 드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어요. 평생을 해온 일이지만, 의식도 무의식도 배역이 지배해버리면 작은 휴식조차 스트레스가 됐어요.”

-웅장하고 쓸쓸한 김훈의 문장을 살아본 기분은 어떻던가요?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명대사들이었지요. 말의 뜻이 너무 좋았습니다. 최명길은 과거의 인물이지만 그의 말로 옛 감정을 거슬러 사용하다 보니 그의 세상에 아주 가깝게 닿는 느낌이었어요.”

소설가 박경리는 ‘남한산성'을 읽고 “이 소설의 소리 없는 주인공은 병자년 동장군인 ‘추위'였다"고 했다. 영화 속에서 최명길(이병헌)이 엎드려 행궁의 낡은 마룻바닥을 보고 말할 때마다 입에는 허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영화 내내 자주 눈발이 날렸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김훈은 소설에서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고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다'라고 적었다.


‘...황제의 깃발을 가까이 바라보면서 이 돌담 안에서 말라 죽는다면 그 또한 황제의 근심이 아니겠나이까. 하늘과 사람이 함께 귀의하는 곳에 소방 또한 의지하려 하오니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영화 ‘남한산성'에서 그는 스스로 치욕의 ‘투항글’을 지어 칸을 찾아간다.

-울음기가 몰려온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 말하는 이병헌의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었어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영화가 나오면 내가 70% 이상 바닥을 보며 얘기하겠구나. 관객들도 답답해하면 어찌할까. 김상헌(김윤석)과 저는 왕을 쿠션으로 말을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눈을 보지 않으니 그의 숨소리와 목소리가 가깝게 들리더군요. 앞 못 보는 사람이 청각과 후각이 발달하듯, 그렇게 청자로서 예민해졌습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관객들도 내 눈을 못 보니 내 눈꺼풀이나 목소리를 확 당겨서 보겠구나.”

어디 목소리뿐이랴. 문득 ‘역적을 자처한' 말의 하중으로 고개를 떨구던 그가 ‘비겁한 말'이 담긴 항복서를 품에 안고 청의 군막으로 내달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말 위에 작은 몸집으로 앉아있던 이병헌의 몸을 잊을 수 없다.

한 배우의 몸에 그저 작은 반도에 또아리 틀고 살고 싶었던 조선인의 눈물과 길을 묻는 과객 같았던 조선왕의 말투가 피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가끔씩, 이렇게 한국말을 쓰고 한국 땅을 살아간다는 것의 실체를 목격하게 만드는 이병헌.

배역의 말이든 자연인의 말이든, 진지해지기를 민망해하는 그지만, 작년에 영화 ‘밀정'의 독립군 대장 정채산으로 분했을 때도 비록 도망자 신세였으나 그 말의 결기가 영화 전체를 장악해버렸지.

“난 사람들 말은 물론이고 내 말도 믿지 못하겠소. 다만, 저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말’이 아니고 ‘일’만 믿는다는 사람의 목소리는 왜 그다지도 아름다운지.

-말의 내용 때문인지 목소리가 더욱 구슬프고 낭랑하게 들렸습니다.

“목소리 좋은 분들이 너무 많았어요. 김윤석, 송영창 등등 다들 연극을 하셨던 분들이라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곤 했습니다.”
                                                    . . .

                                                    . . .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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