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선택이 있었다면 그건, 배우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COMMUNITY

어쩌면 서로에게 닿을 지도 모를, 같은 마음들이 모여 있는 곳

제목 <아이리스3, 4회>"근데, 나 궁금한 거 있어."
작성자 : 제비꽃 등록일 2009.10.30 조회수 5906

"근데, 나 궁금한 거 있어."


"뭔데?"


"그 때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키스한거야? 나에 대한 도전이었어? 아님, 사랑이었어?"


"그 때 그랬던 게 키스라기보다는 그 이쁜 입술에서 어떻게 그렇게 거침없이 막말이 나오는지, 그냥 잠깐 틀어막고 싶었던 거지."


"그럼, 앞으로 막말 많이 해야지."


--<아이리스>3회 중에서.


 


현준과 승희가 아키타의 눈 내린 들판을 걷다가 눈싸움을 시작한다. 그 장면을 보면서 곤지암으로 떠났던 첫 사랑의 여행이 생각났다. 그 땐 정말 눈을 둥글게 뭉쳐서 서로에게 던지는 것만으로도 왜 그렇게 신이 났던지. 돌아 오는 버스 안에서 나란히 앉은 우리의 무릎에 나의 파란색 털 목도리를 펼쳐 덮었던 기억이 난다.


배우 이병헌은 어떤 첫 사랑의 추억을 지니고 있을까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보아도 신나는 시절. 손만 잡아도 온 몸에 전기가 흐르던 순간들. 상대방의 입에서 방금 자신의 입으로 건네 온 음식도 그토록 맛있게 느껴지는 친밀감이란 어떤 이론이나 강제적인 훈련으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매우 감각적이며 본능적인 반응일 것이다. 사랑하는 상대방의 모든 것들에 대하여 거부감 없이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만듦으로써 낯선 타인을 가장 친밀감 있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비밀이 우리의 몸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할 뿐이다.


나도 유치한 거 되게 좋아 하는데, 내가 알기로는 배우 이병헌도 유치한 거 되게 좋아한다. 개구지게도 즐긴다. 대사 없이 전해 주던, 포장되어 있지 않던 우유빛 동그란 사탕을 보는 것만으로도 입 안 가득 군침이 돌만큼 달콤하고 또 달콤하다. 사랑의 추억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타액까지도 꿀처럼 달콤한.


청년 시절의 현준이 된 배우 이병헌은, 극중에서의 현준보다 더 어려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스노우보드를 탄 이후 장면에서였을 것이다. 갈색빛 모자에 점퍼를 입고 승희와 계단을 뛰어 오르는 모양이다. 20대 초반의 청년처럼 빛나고 있다. 신나게 연인과 앞다투듯 뛰어 오르는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하고, 사랑의 희열이 가득하다. 영화와 드라마 촬영으로 심신이 매우 지칠대로 지쳤을 때였겠지만, 그는 연기하는 그 순간만은 온전히 자신이 되어야 할 그 사람으로 변신하는 힘이 뛰어나다.


그래서일까. 아무 관심도 없던 10대의 여학생들에게 현준은 설레임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곧 성인이 될 여학생들에게 남성다우면서도 다정하고, 냉정하면서도 눈물 글썽이는 여린 사랑의 감수성을 지닌 남성적 매력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으랴. 말끔한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와 함께 나이들어 온 세월을 잊게 된다. 아니, 나 혼자만 시간이라는 배를 타고 이쪽으로 멀리 건너온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는 다시 회춘하고 있다. 젋고 아름다운 몸매까지 자랑하는 현준으로 말이다. 그 현준이 아픈 사랑에 울고 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과거로 인하여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쉴 새 없이 뛰고 숨고, 다시 사랑하는 승희를 애타게 찾는 현준으로 우리 앞에서 신음하고 있다.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살아 남아야 하는 현준은 우리에게 삶의 희노애락의 모든 것을 그 짧은 시간 안에 다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배우 이병헌, 그 자신에게 주어진 그 동안의 경험들로부터 그는 그 많은 것들을 예측하고 감각하며 뛰어난 상상력으로 변신하기에 몰입하고 있다. 상상력. 바로 이것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삶을 몇 십 년 동안 다 경험할 수는 없기에, 예술가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협소한 경험의 틀을 넘어설 수 있는 상상력과 동물적 감각이 있어야 할 것이다.


결코 무뎌지지 않는 촉수를 온 몸에 지니고 있는 듯, 그는 주인공 현준이 몰린 상황의 변화마다 보이지 않는 물결처럼 고운 결을 지닌 촉수를 움직여 자신의 눈가의 미세한 떨림이나 눈길을 통해 내보내는 감정까지도 섬세하게 조절하는 것이다. 분명한 거짓임을 우리 서로 모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짓이 실제처럼 느껴지도록 몰입하게 하는 엄청난 힘을 그는 온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가끔 힘든 오후에 계단을 뛰어 오르며 웃던, 막 사랑에 빠진 청년 현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 옆에 누가 서든지 간에 배우 이병헌으로 인하여 상대 배우는 아름다운 연인이 될 것이다. 자신 뿐만이 아니라 촬영 세트와 배경을 이루는 각국의 명소들과, 그와 겨루고 의리를 나누고 배신하는, 사랑을 나누는 모든 배우들을 살아 숨쉬게 만들 것이다. 아니, 그 모든 것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앞으로 10년이 더 흐른다 해도 배우 이병헌은 그렇게 서럽도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모자를 푹 눌러쓴 점퍼와 청바지 차림으로 가볍게 계단을 뛰어 올라 가슴 떨리는 우리 앞으로 올 것이다. 그런 그를 너무도 사랑한다.